도민칼럼-포노사피엔스 시대에 영혼의 터치를
도민칼럼-포노사피엔스 시대에 영혼의 터치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2.22 15:1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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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애/작가·진주 배영초 교사
안정애/작가·진주 배영초 교사-포노사피엔스 시대에 영혼의 터치를

디지털시대와 4차 산업혁명시대의 일상과 교육은 이미 테크놀로지와 연계된 에듀 테크 환경이다. 스마트폰의 휴대로 인에 모든 정보가 노출된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를 뜻하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시대이다. 모두가 연결이고 플랫폼의 연계다. 로봇이 커피를 내리고 인공지능으로 소설을 쓰는 세상,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여태 해 오던 방식과 여러 가지 활동 상황을 자연적 소실 경향성이라 하는데, 그 경향성에 진폭과 주기는 달라도 방법과 요령은 시간 활용 기법과 개별적인 사고(思考)와 정선된 마인드(mind)라 여긴다. 크로노스 시간과 카이로스적인 시간에 농축된 시간 할애를 잘하는 자만이 이러한 시대에 적응한다. 그리해 인간의 영성(靈城)에 누구나가 나쁜 세 마리의 고양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고양이 하나는 시기와 질투 다음 하나는 경쟁, 그 다음 하나는 미움이라 여긴다. 아이들은 듣지 않은 듯, 해도 모두 다 들으나, 어른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진화가 잘된 사회일수록 자기가 최고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그러한 사회는 건강성이 역하다. IT시대는 자기를 부각하는 시대라 누구나 가르쳐 들려고 한다. 대화의 기술에서도 연합의 원리로 핵심을 모아 좋은 안건(案件)을 찾는 것이 정점인데 대부분 대화 장면에 흐르는 기류는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 하고 내 의견만을 관철하려는 본질은 희색이 되고 현상에만 급급한 결론을 맺기 일쑤이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기(낮추기)를 대다수 거부한다. ‘저 주고 싶은 생각보다 나는 잘 났어!’ 라는 의식이 아주 크다. 그 주변엔 분명 상호작용도 한 몫 하여 축적이 되기도 하나, 알파가 이루어진 결론에 도달해 자기다움이 되기까지는 누구나 맨홀에 갇힌 고양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협력해 하는 일 더불어 하는 일에 근접하기를 거부한다. 세계 최고의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는 2030년까지 일자리 20억 개가 사라진다는 언급을 오래전부터 했다. 아이들이 살아갈 4차 산업혁명시대는 창의 융합형 인재를 요구한다. 주제를 갖고 접근하자고 할 때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낸다. 자신을 양보하고 배려하여 상대를 존중하여 발전적인 향상 그룹을 이루는 모둠학습을 하려는 긍정형도 있으나 대부분 모둠을 하여 토의하고 토론하는 학습이 부자유스러워 한다. 아니 애써 그러한 활동을 어려워한다.

최근 부르짖는 협력과 상생이 된 모멘트 활동이 여러 곳에서 부르짖고 있다. 바로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트렌드(trend)다. 누구나 하브루타식 토론식 학습에 불편해 한다. 소통과 통합 안에 교감을 잘하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잘 이루어야만 앎과 삶이 연결되는 것이다. 만6세 집단에도 내가 제일 똑똑하고 나를 어필하려는 소리가 강하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이 요하는 다소 늦게 가는 아이 김**는 전교생과 직원들이 모두 좋아한다. 이 경향은 생활 속에서도 발견된다. 어떻게 보면 쉽게 살아가려하는 편함과 덜 힘들게 할까를 연구하고 고민하여 문명에 의존하는 시대에 역행해 오는 방어적인 심리기재일 것이다. 예고도 없는 정전이 되거나 단수가 되었을 때 우리는 불편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와 같은 행간에서 보자면 모두가 완벽히 요령을 피우고 영악한 곳으로 집중하니 어리숙하고 좀 부족한 사람에 눈길이 간다. 시설이 덜한 미약한 아날로그적인 감성에도 초점이 모아진다. 모 채널의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을 갈구하는 것 역시 같은 셈법이다. 인간의 저 밑바닥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한다. 우리의 본향 영혼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러한 맥락을 같이 하는 것에 참다운 쉼을 추구한다. 말쑥하게 쓰진 워드로 잘 작성된 글보다 서툴지만 자기만의 손 글씨에 애착을 갖는다. 계산을 너무 잘 하고 따지는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참 영성에 안기고 살아가고파 한다. 이어령 교수님의 ‘지성을 넘어 영성’이라는 거창한 멘트를 떠올려 보지 않아도 우리 내면의 소리에 흐르는 편안함, 평안함은 누구나 누리고픈 아주 자연스러움이다. 나를 비우고 나안에 느림의 시간을 갈구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심혼(心魂)이다. 기술과 똑똑함에 탈피해 조용하고 느린 영성에 나를 다스려본다. 바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천천히 낙조(落照) 한 가운데 물오리가 헤엄치는 남강 가를 달려가 본다. 그 영원성에 나를 담금질 해본다.


작가이력 2005년<시조문학>등단 2011<꽃등> 시집2019<그 큰사랑>소설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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