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희생적인 이약신 목사
진주성-희생적인 이약신 목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2.25 14: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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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희생적인 이약신 목사

이약신(李約信)목사는 여주 이씨로 부산·경남지역에서 목사직을 수행했다. 부산 <초량교회 백년사>에는 제 4대 목회시대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었다. 이약신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주기철과 절친하게 지냈다.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배 주기철의 주선으로 경남지역으로 이주해 웅동중학교 교사로 근무중이었다.
이약신은 성주이씨 수산물 상인 이상소의 딸인 이옥경을 만나 혼인했다.

처가의 후원으로 1917년 일본 중앙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2년간 수업을 받던 중 장인 이상소(3·1운동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는 독립선언서를 받아 김용환에게 전달하고 서대문감옥에 갇히자 바로 귀국했다.

이약신은 문창교회 성가대원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다. 안수 집사를 거쳐 장로와 조사가 되었다.

이약신은 <신학지남>에서 글을 발표했다. 신학교 졸업생 자격으로 진주교회 청빙이 통과되어 31세 때 동사 목사로 위임되었다.

김익두 목사를 초빙해 부흥회를 개최하니 밤마다 천명이상이 모였다.

부오란 선교사가 시작한 소년수양회를 되살려 최준 의사 강용성 선생과 함께 영어를 가르치고 종교 교육을 실시하니 80여명이 운집했다.

1931년 진주를 떠나 부산 초량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었다.

1937년 5월 호주장로교단 100주년 기념대회 한국 대표로 참석해 유창한 영어로 대화하고 설교했다.

1953년 9월 진주성남교회에서 총노회는 목사 50명 장노 37명이 모여 회장 이약신 부회장 한상동 목사를 피선하니 300개 교회가 소속된 거대 교단이 되었다. 1956년 6개 노회가 모여 고신파 첫 총회를 개최하여 제 1대 2대 3대 총회장을 연임하였다.

박윤선 목사 한상동 목사 등 3명은 미국 필라델피아로 가서 국제협의회를 개최하였다. (1954년 11월 7일자 미국 신문에 보도)

진해 교회와 진해 남부교회에서 시무했다.

이약신 목사는 딸 5명을 낳고 아들 성웅을 낳았다. 큰 딸 이효주는 의사와 혼인하고 둘째 이효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이화여대 교수로 정년퇴직했다. 셋째 이효숙은 치과 의사와 결혼하고 넷째 이성숙은 미국인과 혼인해 딸 3명을 낳았다.

다섯 째 이은화는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유일한 아들 이성웅은 서울대 작곡과 졸업 후 미국에 살면서 딸 4명을 낳았다.

이약신 목사는 1957년 1월 진해에서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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