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진주지역 가야사(伽耶史) 재 발굴
도민칼럼-진주지역 가야사(伽耶史) 재 발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2.25 14: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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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
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진주지역 가야사(伽耶史) 재 발굴

한반도 한강 하류 남쪽은 변한(弁韓) 유민들이 낙동강 중심으로 서쪽은 전라도 남원, 구례 땅, 북쪽은 경북 성주, 동남쪽은 김해, 고성, 남해, 해안을 중심한 농경생활과 특징 있는 문화를 가지고 500여 년간 긴 역사를 이룩한 가야는 과연 어떤 나라였던가. 학술상 가야(伽耶)라 칭하였는데. 김해 김씨 수로왕 후손들은 가락(駕洛)이라 칭한다. 우리 역사에 기록조차 사라진 고대 번영의 나라 가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주인임을 그들이 남긴 유물들은 곳곳에 출토된다.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 개국 1978년 연대로 이어져 간다. 그들의 삶터에 문화 유적, 유물이 곳곳에서 출토되어 대학박물관 보관창고를 매우고 있으나 분류 초차 못하는 실정이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야기>란 기록이 엄연히 전하는데, 가야는 왜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가? 선방 화두처럼 의문이 첩첩히 느끼며 누구도 정답이 없다. 필자는 김수로대왕 후손 남능참봉이란 업무로 매월 초하루 보름 날마다 시조 릉을 순향하며 물어서 왔다, 그 대답이 될 까만은 인류전체가 보존해야 할 세계 중요문화 유산 등제 사업으로 현 정부의 100대 공약사업이 곧 <가야 사 복원사업>이라 하겠다.

세계 중요문화유산 등제를 위해 경남 김해를 비롯하여 함양, 합천, 창녕, 고성, 경북의 고령, 상주, 전라도 남원 등지는 이미 가야 사 복원 조례 제정과 조직 운영으로 예비 조사를 마치고 발굴, 정리사업 진행에 많은 성과를 이미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주지역은 가야국 영역임이 분명한데 왜 일손을 놓고 그렇게 무관심한자세가 더 의문이다. 도시 중심에 크고 작은 가야 매장유적 고분군들이 형성된 곳이 많았으나, 토굴로 방치 된 곳, 도시 확장으로 소실된 가야 고분군, 개인 경작지 택지의 확장으로 수 백 여기가 유실되고 있는 현실을 먼 밭에 불보는 듯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선학산 전방대 건립 기초공사 과정에 가야 고분군 같다는 시민들 제보마저 묵살되었다, 진주시내 중심부에 가야 고분군이 많았으나 대부분 도시 확장. 일제 때 도굴 및 강제 철거된다. 현재 수정봉 옥봉고분군은 비봉산 남쪽 7기의 고분군이고 그 주변에 고분군이 여러 개 있었으나 어느새 빈틈없이 집터 경작지로 변하였다.

또한 일제가 수정 옥봉고분군을 1910년 관아 청이 조사 목적으로 3기를 조사 명목 발굴했고 나머지는 정확한 계획도 없이 고분 발굴되어 여러 점토기, 귀걸이, 목걸이 등이 <조선고적도보>에 소개된 바 있다. 당시 일본인과 도굴 작업에 참여한 분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서 왕관 1쌍이 발굴되었다고 증언 한바 있으며 신분 노출로 대화마저 기피하면서 진주지역 토기 특징을 설명하며 가야왕국의 수도를 주장한 그 자체 안타까운 일이며 경상대 박물관, 대평 가야유물관 등에 가야유적이 처리곤란 자료로 있는 실정이다.

진주시는 왜 가야 사 복원에 입을 다물고 있는지 궁금하다. 타 지역 시 군은 세계문화유산 등제 준비에 필요한 조례 제정과 예산 지원, 담당부서의 활성화를 이미 진행하고 있는데 진주시의 가야 유물 복원사업에 대한 무관심이 매우 답답한 실정이다. 특히 수정고분, 옥봉고분군의 출토 사료들이 현재 일본 동경대학 공학부 건축사연구실, 일본 동경대학 종합연구자료관에 보관된 유물 반압이 선결문제라 하겠고 우수리, 사봉면, 내촌리, 호탄동, 유곡동, 장재실, 선학산 일대 등에 관심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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