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바람 한 줄기
시와 함께하는 세상-바람 한 줄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01 14:4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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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바람 한 줄기
 
바람 속엔 헤아릴 수 없는 냄새와 소리와
얼룩과 소문들이 있다
높은 산맥을 넘은 후 평지에 도달한 바람 속엔
무(無)가 있다
 
이 바람은 무겁다
이 바람은 무겁지 않다
이 바람의 몸속엔 한 방울의 물기도 없다
 
없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면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다
없는 사랑이 가득 차오르면 바보처럼 자주 웃는다
 
꽃들은 텅빈 나무의 엔진이다
겨울이 지나가면 작란(作亂)이 다시 시작된다
 
바람 속엔 다시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하고
이 낮은 지상은 신음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김경임 시인, ‘바람 한 줄기’)
 
쉼표 마침표 하나 없는 것이나 흐름이 굉장히 매끄러움으로 볼 때, 짐작하건데 즉흥적인 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이란 참 묘한 존재이다. 환경에 따라 역할이 무궁무진하게 나타나니 말이다. 생의 활력소가 될 수 있는 희망이나 혹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무절제된 소문, 혹은 한 때의 유행을 몰고 오는 생활양식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바람의 형체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감을 모두 동원해야만 확인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감을 모두 동원을 해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바람 한 줄기>는 이렇게 오감을 동원해도 알기 어려운 생명전달 기능에 대해서 묘사되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불어오던 바람이 높은 산맥을 넘어오면서 가지고 있던 수분을 모두 소진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無) 다시 눈물겹게 수분을 모아서(重) 마른 나뭇가지에 뿌려 줌으로써(輕) 생명을 싹트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거룩한 희생이요,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시인이 보고 있는 바람이다. 죽을힘을 다해 생명의 씨앗을 살리고 기진맥진하는 것은 지금 막 자식을 분만한 어미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사랑을 베풀면 항상 기쁘고 으쓱한 것이 누가 보면 바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인의 눈에는 바람이 그렇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바람이 배달해 준 수분을 통해 메마른 가지에서는 또 꽃을 피우는 것이 온통 나무의 엔진처럼 보이지만, 물은 그 엔진을 움직이게 해주는 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 속에는 언제나 생명을 싹트게 하는 엔진 소리 요란하겠지만 그것은 결국 바람이 배달해준 눈물 같은 기름(물)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인은 평소처럼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자연현상에 대한 원리를 예리하게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발견된 순간표착의 과정을 시(詩)라는 매개로 형성화함으로써 이렇게 바람의 서사를 노래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바람을 통해 언어를 조탁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렇게 대자연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오며, 이런 시를 만날 때마다 시에 대한 애착이 절로 생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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