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첫’을 음미해 본다
칼럼-‘첫’을 음미해 본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06 16:1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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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첫’을 음미해 본다

만일 한 인간의 전 생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첫’이라는 글귀에 의미를 두고 싶다. ‘첫’은 다른 말 앞에 붙여서 ‘처음’의 뜻으로 쓰는 관형사(冠形詞)이다. 첫걸음·첫 경험·첫 국밥(산모가 아이 낳은 뒤 처음으로 먹는 미역국과 흰밥)· 첫 길·첫 나들이·첫날밤(초야, 初夜)·첫눈·첫 단추·첫 닭(새벽에 맨 처음에 우는 닭)·첫 데이트·첫 돌· 첫마디·첫 만남·첫 물 지다(그 해에 들어서 첫 홍수가 나다)·첫밥·첫 술(처음 떠먹는 밥술)·첫 술잔·첫째·첫손님·첫 인상·첫 월급·첫 키스·첫 편지·첫차·첫 행보 등등, 많은 예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그 대표성은 ‘첫사랑’에 부여해야 할 것 같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때문이다. 이들 ‘첫’은 모두 그 최초의 행위나 인간관계로 해서 인생행로가 결정되는 ‘운명’의 계기라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몇 가지 문장들을 소개해 본다. 구약 <창세기>의 1장 1절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첫 대목과 <천자문>의 ‘天地玄黃宇宙洪荒’첫 대목에는 천지창조 직전의 카오스적인 파노라마가 <창세기>와 흡사하게 펼쳐지고 있다. 소설 가운데 가장 거대담론에 입각한 것은 ‘천하대세는 나누인 지 오래되면 모이고, 모인 지 오래되면 나누인다’라는 <삼국지>의 첫 문장이다. 이는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라는 불교의 ‘회자정리(會者定離)’와 상통한다.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까레리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이란 모두가 매우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 나름으로 불행한 것이다’인간의 삶의 양극인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이처럼 포괄적인 의미 규정을 내린 명언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첫 문장은 이상(李箱)의 <날개>가 아닐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이 말 속에는 인간적인 기능을 상실한 천재시인의 슬픈 자화상이 짙게 깔려 있다. 초인을 지향한 철학자 니체는<반기독교(안티크리스트)>라는 소책자의 서두를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를 소개하고자 한다’로 시작한다. 그 고뇌에 찬 자긍심, 정신이상에 이른 자아도취 철인(哲人)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옛날에 옛날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습니다’로 시작되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도 흥미로운 첫 문장이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은 흰쥐의 해이다. 흰색에 해당하는 천간 ‘경(庚)’과 쥐에 해당하는 ‘자(子)’가 만났다. 쥐는 십이지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동물. 십이지 동물 중 가장 크기가 작고 보잘것없지만 번식력이 강해 예로부터 다산과 풍요, 재물을 상징했다. 미래를 예측하고 민첩하고 영리한 동물로 인식돼 왔다. <한국민간속신어사전>에는 “쥐가 도망가면 집안이 망한다. 쥐가 집안에 흙을 파서 쌓으면 부자가 된다”는 문구가 있다. 쥐가 재물과 연결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세시기(歲時記)>에선 새해 첫날 쥐주머니를 전해 풍년을 기원하던 풍속을 볼 수 있고, 민간에선 쥐를 의미하는 한자인 ‘서(鼠)’자를 부적(符籍)으로 그려 붙여 풍농(豐農)을 기원했다. 우리 속담(俗談)과 속신(俗信)에 쥐는 영민하고 부지런한 동물로 그려진다. ‘쥐가 배에 없으면 배가 침몰한다’, ‘쥐가 천장에서 소란을 피우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속신은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쥐의 영민함을 보여준다. 쥐는 사람과 유전자의 80%가 같다. 19%는 매우 닮았고, 완전히 다른 것은 1%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쥐가 가진 유전자 3만 개 중 사람과 다른 것은 300개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쥐를 연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쥐와 사람이 닮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쥐를 간신이나 수탈자, 탐관오리로 빗댄 문학 작품도 있었다. 1960년대엔 가뜩이나 부족한 곡식을 훔쳐 먹는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면서 쥐잡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치기도 했었다. 약삭빠른 사람을 일컬어 쥐에 빗대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온 기회를 활용할 줄 아는 명석한 사람에 비유하기도 한다. 2020년에는 우리 모두 쥐의 긍정적인 면으로 가득한 한해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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