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을 낚는 어부
아침을 열며-사람을 낚는 어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12 16:2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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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
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사람을 낚는 어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태 4:18-20, 마가 1:17)

기독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베드로’라는 이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서방세계의 저 무수한 피터, 페터, 삐떼흐, 뻬떼르 등도 다 그를 기리는 이름들이다. ‘피터 팬’도 그중 하나다.) 그 베드로와 예수의 첫 만남을 전하는 장면이다. 이 베드로가 바울과 더불어 오늘날의 기독교를 있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기독교가 2000년 이상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거대종교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장면은 실로 역사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예전에 〈제자론의 한 토막〉이라는 글을 책과 신문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이른바 인류 4대성인이 모두 훌륭한 제자들 덕분에 세상에 알려져 오늘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공자의 경우, 안회(顔淵)를 비롯해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증삼(曾參) 등 논어에 등장하는 무수한 제자들, 부처의 경우, 아난다를 비롯해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가전연, 아나율, 우바리, 라후라, 등 십대제자, 소크라테스의 경우, 플라톤을 비롯해 크리톤, 파이돈, 크세노폰 등 무수한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경우, 이 베드로를 위시해 이른바 12제자(안드레, [대]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소]야고보, [다대오]유다, 셀롯, [가룟]유다, 맛디아) 그리고 바울, 마가, 누가, 바나바 등이 각각 그 스승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전파해 전 인류에게 그 선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의 공이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이 평생 학교선생으로 살아왔기에 이 부분을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예수는 왜 ‘나를 따르라’고 어부인 베드로를 불렀을까.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만큼, 그는 아마도 제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지 모른다. 사실, 종교적인 부분을 괄호치고 말하자면, 예수의 길지 않은 인간적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교육활동과 의료활동이다. 가르치고 고쳐주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가 ‘랍비’(=선생님)라 불린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그 자신이 선생으로서 베드로 등 열두 제자를 낚은 어부였고 그 제자들도 또한 그렇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 위대한 전통이 그후 2000년간 낚아 올린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다. 현재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신학대학들 및 미션스쿨들도 아마 그 전통을 계승했을 터이다. 그 모든 이들이 각각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노력으로 이 세계를 선한 방향으로 유도했음을 생각해보면 그 원점에 있는 이 예수의 베드로 낚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하다’는 단어로도 아마 불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떤가. 우리는 지금 과연 이런 예수식 ‘사람 낚기’에 관심이 있는가. 이런 종류의 낚기에서는 그것의 ‘어떤’(How)이 핵심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을 위한’ 낚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을 낚아서 사기를 치게 한다든지, 돈벌 궁리만 한다든지, 출세의 도구로 삼는다든지, 세력을 키운다든지 해서는 그 낚기가 선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체가 위험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고, 않느니만 못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낚아 어떤 것을 가르쳐 어떤 일을 하게 할 것인가. 예수의 모든 발언내용에 그 답이 있다. 결국은 ‘선’이다. 그게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모범을 보인 베드로 낚기. 키우기. 선을 위한 재목 만들기.

21세기의 세상은 지금 너무나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원리는 언제나 시공간을 초월해 ‘단순한’것이다. 기본은 영원불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이 있고 선생과 제자가 있다. 선생은 제자의 재목을 알아보고 낚시를 드리워 혹은 그물을 던져 ‘낚아야’한다. 그리고 그를 가르쳐야 한다. 키워야 한다. 단, 무엇을? ‘선’을 위한 것이다. 사람의 ‘좋음’을 위한 것이다. 나만의 좋음이나 패거리의 좋음이 아닌, 세상의 ‘좋음’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아마 ‘신의 좋으심’과 자동 연결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마지 않는다. 나도 그런 좋음을 위해 세상이라는 바다에 책이라는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데 아직은 별로 입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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