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인간의 정의
칼럼-인간의 정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13 15:00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인간의 정의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가 <햄릿>을 통해 인간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칭송한 이래, ‘만물의 영장’은 인간 호칭의 왕좌를 차지해 왔다. 그 왕위를 호시탐탐 노려온 것이 아마도 프랑스의 수학자 파스칼(1623~1662)의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일 것이다. 철학자는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종교인은 죄, 시인은 사랑, 군인은 전투, 사업가는 돈, 정치가는 권력, 학자는 지식이라고 말한다. 어린이들만이 ‘놀이’라 생각한다. 철학의 원조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BC624~BC546)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의 첫 번째로 삼았고, 두 번째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 세 번째는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뒤를 이어 프로타고라스(BC481~BC411)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선언했다.

반면 인간의 정의에는 ‘동물’이 자주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는 ‘정치적 동물’,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종교적 동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모방하는 동물’,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얼굴 붉히는 동물’, 프랑스의 풍자 작가 프랑수아 라볼레(1494~1553)는 ‘유일하게 웃는 동물’, 프랑스의 작가 몰리에르(1622~1673)는 ‘사악한 동물’이라고 했는가 하면, 프랑스의 과학자 파스칼은 ‘신과 동물과의 중간적 존재’, 독일의 철학자 니체(1844~1900)는 ‘동물과 초인 사이의 한 가닥 밧줄’,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관념의 생산자’,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존재의 목동’이라는 형이상학적으로 정의를 내리기도 했고,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67)는 ‘지구의 질환’,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우주의 불량소년’과 같은 비판적으로 규정을 하기도 한다.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은 시인답게‘미소와 눈물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 읊었고, 독일계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은 ‘문명사적으로 19세기에 신은 죽었고, 20세기에는 인간이 죽었다’고 진단했다.

인간에 관한 책을 검색하다 보니 저술가 진중권(1963~)의 <호모 코레아니쿠스(Homo Coreanicus)>와 소설가 이문열(1948~)씨의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라는 제목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자는 연구서, 후자는 소설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공통적으로 쓰인 ‘호모’라는 어휘가 눈길을 끈다. ‘호모’란 ‘인간’을 지칭하는 학명(學名)으로, 공식용어는 1753년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1707~1778)가 최초의 인간조상들이 여타 동물류와는 차별화된 지혜를 소유했다는 뜻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곧‘지혜인’이라고 명명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그 이후 인간의 발전상과 시대적 특성에 따라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직립인)’,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언어인)’,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정치인)’,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경제인)’, ‘호모 엘리지어스(Homo reliousus=종교인)’, ‘호모 아텍스(Homo artex=예술인)’등의 다채로운 학설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광의로 볼 때 이들 모두는 사실 ‘문화인’의 각론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인류문화 발전이 최 극점에 달한 현재의 상황에서 진정한 ‘호모 사피엔스’로 반성해야 할 것은 과연 인간만이 지닌 ‘지혜’를 얼마나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사용해 왔느냐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1889~1975)는 인성에 내재된 ‘잔악한 힘’을 경고했고, 영국의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모든 인간은 악한’이라고까지 성토했다. 현대에 올수록 더욱 악화된 인성을 생각할 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BC470년 경~BC399)의 ‘돼지가 되어 즐거워하는 것보다 사람이 되어 슬퍼하는 것이 낫다’는 말은 인간성 사멸의 슬픈 장송곡 가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환경 파괴나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 슬픔을 넘어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만물의 영장’인 ‘호모 사피엔스’의 업보가 아닐까. 날만 새면 연일 TV나 신문 면을 크게 장식하는 인간 아닌 인간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하루하루 괴로운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