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동지 팥죽
시론-동지 팥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19 14:5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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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동/경남도립거창대학교 총장
박유동/경남도립거창대학교 총장-동지 팥죽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참 곤란한 질문이다. 특별히 싫어하는 음식도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특별히 싫어하는 음식 하나가 있었다. 매년 동짓날에 온가족이 함께 먹는 팥죽이다. 내가 팥죽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 때문이다.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았다. 산골짜기 다랑논 몇 마지기 농사 지어 아들 5명 거두다 보면 쌀은 일찌감치 동나기 마련이었고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 시절이었다. 보통은 솥에 보리쌀을 깔고 가운데 한 움큼 쌀을 넣어서 밥을 짓는다. 아버지 밥, 큰형의 밥은 그래도 쌀의 비율이 높았고 그 외 나머지 가족들의 밥은 보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팥죽은 부자건 가난하건 지위에 관계없이 다 같이 먹는 가장 평등한 음식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이었던 것 같다. 동짓날에 팥죽을 먹고 두드러기가 난 적이 있었다. 두드러기의 원인이 팥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었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다만 그걸 핑계로 난 팥죽 먹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상하게 일이 전개가 되었다. 팥죽을 먹으면 탈이 나는 특별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노란 양은 냄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지어주셨다. 이런 특혜를 받은 이후로 난 팥죽을 먹으면 탈이 나는 특별한 아이가 되었고 매년 동짓날만 되면 팥죽대신 쌀밥을 혼자서 독식하는 호사를 누렸다.

살면서 우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필요에 따라 조금씩 거짓말을 하고 살아간다. 그걸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선의의 거짓말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되고 그걸로 인해 내가 얻는 이익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팥죽을 먹으면 두드러기가 난다는 핑계로 보리밥 먹던 시절에 혼자 쌀밥을 먹는 이익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다른 형제들에게는 피해를 주었다. 나중에라도 그걸 알았다면 사실대로 말하고 바로 잡아야 하는데 난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계속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사실을 밝히지 못한 것이다.

원래 나는 음식에 대해서 좀 까다로운 편이었다. 결혼 초에는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5% 부족한 집사람의 음식에 대해서 불평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 시골에 혼자 계셨던 아버지를 예고도 없이 불쑥 뵈러갔는데 막 저녁식사를 하고 계셨다. 혼자서 드시는 초라한 아버지의 저녁 밥상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났다. 그 이후 난 음식에 대해서 맛이 있다 없다 하는 것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불평불만을 하면 죄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맛이 없으면 먹지 않을지언정 불평불만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을 어느 정도 살다보니 약간 거친 음식이 입맛에는 안 맞아도 건강에는 좋은 면도 있는 것 같다. 집사람이 음식솜씨가 좋아서 신혼 초부터 내 입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면 아무래도 과식을 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고 아마도 지금 나이에는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이 찾아왔을 것인데 다행히도 5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아픈 곳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5% 부족한 아내의 음식솜씨 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돌아가신지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서야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고백을 한다. “어머니 사실 전 팥죽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우연히 그날 팥죽을 먹고 두드러기가 났고 이후 어머니가 지어주신 하얀 쌀밥이 먹고 싶어 침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나의 이런 얄팍한 수를 알고 계시면서도 짐짓 모른 채 속아 넘어 가주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동짓날이 되면 맛있게 팥죽을 먹으면서도 노란 양은 냄비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하얀 쌀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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