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아래서
살구나무 아래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7.0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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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숙/시인

친정집 텃밭에 살구를 따러 갔더니 나무에 살구 한 개가 안 남아 있었다. 털어도 누군가가 탈탈 털었다. 이웃집 아지매는 “익어서 다 출출 했다.” “진작 많이 열려 있을 때 오지 그랬냐!”고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무 밑에는 떨어져 물러빠진 살구들과 그 씨로 도배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나무 주변 밑바닥이 깨끗한 걸 보면 분명 누군가가 주워가고 털어갔지 저절로 그렇게 완벽하게 떨어질 리가 만무했다.

7년 전 친정엄마가 교통사고로 입원하고부터는 이 나무가 이런 꼴로 서있으니 해마다 열이 치받쳐 당장 톱으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살구나무는 내 것이 아니다. 22년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 나중에 손자들이 집에 오면 살구도 먹게 해줘야지”라며 자두랑 석류랑 모과랑 함께 심으신 것이라서. 그러기에 나에게 이 나무는 곧 살아계신 친정아버지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내 열 받는다고 이 나무를 베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난해 가을에는 내가 하동초감람석운동장 문제에 신경 쓰는 사이 돌쟁이 머리보다 큰 모과들이 하나도 안 남아 있었다. 노랑방울이 노랏노랏 앉을 때까지만 해도 백 개는 족히 넘었는데. 좀 더 익어 좋은 향기 내라고 놔둔 걸 누가 손을 탄 것이다. 아마 살구도 모과도 문제를 삼았다면 상대방은 분명히 바람에 떨어진 것들 몇 개 주워 갔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껏 이에 관해 단 반마디도 안 하고 참았다.
그러나 속은 더웠다. 아니 탔다. 실은 지금도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다. 그 모과와 그 살구를 내가 못 먹어서가 아니다. 왜 남의 땅 남의 나무에 달린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그 나무 밑에서 떨어진 모과가 썩든 살구가 썩든 일단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그걸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주인의 수확이 좀 늦다고 해서 어찌 이런 싹쓸이를 할 수가 있는가!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라 하도 화가 나 생전 안 쓰던 육두문자까지 쓰며 같이 간 남편에게만 화풀이를 다 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모기 물린 내 다리만 박박 긁어댔다. 덧이 나도록. 상처가 벌겋게 부어오르자 우리 아들은 빨리 병원 가보라고 딸은 그건 살구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 살구 우리가 다 먹은 셈으로 치라며. 50kg 쓰레기 봉지도 작다고 큰소리 빵빵 치고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자니 이 아이들 보기가 너무 민망했다.
요새 촌에 인심이 어쩌니 저쩌니 하기 이전에 지금 우리 농촌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이 부끄러운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 모과와 살구가 꼭 우리나라 농민과 농촌과 농협의 자화상 같기에 하는 말이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익은 것 먼저 봤다고 그 사람이 마치 제 것인 양 다 따간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논리고 해서도 안 되는 짓이다. 그러나 이게 진행형 현실이 아닌가.
이는 마치 6.25기념식장에서도 구사일생 백전노장인 참전용사보다는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기관장들이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는 웃지 못 할 행사와 똑 같은 실상이다. 허기사, 문전옥답에도 코스모스나 심고 쌀농사직불금이나 받으라고 정부가 농민을 마구 부추기는 이런 세상이니 이럴 수밖에! 만사형통이라던 그 형의 종말을 보자. 아이들 은행놀이도 아닌데 ‘억’이 장난이다. 이런 판국에 누가 내일을 위해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는가!
911조의 가계부채 앞에서 자유로운 농어업인은 몇 명이나 될까? 단비라서 빗방울을 맞으며 살구나무 아래 서서 텅 빈 가지와 빈 바구니를 보노라니 아이들 앞에 큰소리 땅땅 치고 나온 사실이 무서워 졌다. 4.5년 전 경제를 살리겠다고 목도리 풀어서 감아주던 이 어른의 얼굴이 자꾸 겹쳐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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