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만석아!
시와 함께하는 세상-만석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29 16:22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만석아!


우리 큰아버지 진지 들다 돌 씹으면
돌을 탁 뱉어 놓고 다짜고짜 외치셨다
“만석아, 지게 가 온나, 여기 바위 실어내게”

우리 큰아버지 진지 들다 밥이 질면
숟가락 탁 놓으며 다짜고짜 외치셨다
“만석아, 삽 들고 온나, 도랑 치고 가재 잡게”

우리 큰아버지 맨 마지막 숨을 쉴 때…
“만석아, 선산에 흙구덩이 하나 파라
마누라 옆에 누워서 좀 편하게 자야겠다”

(이종문, ‘좀 편하게 자야겠다’)

푸하하하하하…, 시를 소개하기 전에 좀 웃어야 하겠다. 억지로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해학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나의 대학 은사(恩師)이시다. 참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시이다. 시인의 작품 대다수가 이런 형식이다. 문자 그대로 해학적(諧謔的)인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어휘를 봤을 때, 큰아버지 또한 웃음의 미학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밥에 든 돌이라고 해봐야 사실 돌이 아니라 작은 모래알 정도겠지만, 지게를 가져오란다. 밥이 질다고 밥그릇 속에다 도랑 치고 가재 잡게 삽을 가져오란다. 한 성질 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그냥 일상의 작은 사건들로 웃음을 만들어 한바탕 웃으면서 시류에 찌든 속을 해장하자는 것이다.

이런 부모 아래에 자식들은 참 행복할 것 같다. 평생 성낼 일 없으니, 얼마나 세상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 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만석씨는 참 멋진 아버지를 두고 평생을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건 꾸짖는 말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웃음거리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엔도르핀(endorphin)을 많이 생성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의 종점에 와서 죽음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우리의 큰아버지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만석아, 선산에 흙구덩이 하나 파라마누라 옆에 누워서 좀 편하게 자야겠다” 죽음이 임박하여 남길 유언치고는 너무나 멋지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길을 마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사람처럼 전혀 거리낌이 없지 않은가.

삶의 높은 경지를 이어 온 저력이 없이는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이 말을 통해서 지금까지 돌이 들어 있었거나 질었던 밥상에 대한 에피소드가 결코 남을 꾸짖는 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라도 먼저 영민한 부인 곁에 누워 있겠다는 말이니, 평소 부부간에 서로 의지해 왔음이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삶이 각박해지고 가족 해체가 빈번하여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가끔 언론매체를 통해 부부간 부모·자식 사이에 금전적인 문제로 서로 욕을 보이는 기사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는 세태이다. 오죽했으면 남편이 아내를, 자식이 부모를 해했을까 싶다가도 한 번씩 이런 작품을 읽고 나면 깊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이 작품을 굳이 장르로 구별하자면 시조이다. 시인의 작품을 읽어 보면 기존의 시조에 대한 독자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조라면, 45자 내외의 정형을 유지하면서 내용상으로는 고전적인 범주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시인의 작품을 보면 대부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다른 시집과 수권의 산문집을 보면 대부분 해학적이면서 교훈성이 짙은 작품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형적인 문학적 흐름은 우리 시대에 잘 어울리는 사조(思潮)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다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잘 적응하는 시조의 현대화에 선두주자로 나선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