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문경새재의 역사적 의미
진주성-문경새재의 역사적 의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1.30 15:1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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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문경새재의 역사적 의미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문경새재(聞慶鳥嶺)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로 억새가 많아 새재라고 했고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조령이라고도 했다. 다양한 삶이 새재를 넘었다. 과거 보러가는 선비도 다녔고 가족 생계를 위하여 보부상도, 출장을 떠난 공무원도 고개를 넘었다. 고개입구에 돌무지 성황당도 있었고 선비들은 고개 중턱에 있는 책바위에 돌을 던지며 합격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개국과 함께 조선 정부는 전국에서 한양에 닿는 고속도로 9개를 건설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380㎞ 길을 영남대로라고 불렀다.

경부고속도로보다 48㎞ 짧았다. 걸어서 가면 보름이 걸렸다.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은 충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왜군과 맞선 의병으로 새재 개울 앞 매바위 길목만 지키면 적은 병력으로도 나라를 지키리라 믿었다. 매바위 앞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고니시와 가토가 이끄는 일본 병력 4만명이 무혈로 통과한 길목이었다. 1594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2년 뒤 새재 고개에 평화가 왔다.

문경에 부임한 현감들도 태평천국을 누렸다. 경상감사 이취임식이 벌어지던 새재 교귀정(交龜亭) 옆에는 선정비가 여럿 서 있다. 애흘비는 한풀이를 피하려고 아예 큰 바위에 조각으로 새겨놓았다. 신충원이 1596년에 제2관문을 세우고 근 200년이 흐른 숙종임금대에 제1관문과 제3관문이 축성됐다. 구한말 문경에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 토벌대가 새재를 휩쓸었다. 그때 제2관문과 제3관문이 무너졌다. 제1관문은 1950년 6.25때 전화(戰禍)를 겪었다. 제2관문 부근 아름드리소나무 밑동에는 일제강점기 후반 군용연료로 송진을 채취한 브이자 상처가 남아 있다. 제3관문은 1974년 대대적 보수 끝에 복원됐다. 1976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초임시절 교사로 있었던 문경을 찾았다. 그때 포장도로로 계획된 문경새재 개발이 전면 백지화 됐다.

지금 새재길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단장하여 다니고 있고 새재길은 관광공사가 선정한 ‘걷고 싶은 길’1위에 계속 오른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새재에 관문을 세우고 정유재란때 일본군 통과를 저지시킨 신충원의 인생은 이해 할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충원이 모집한 사람 중에 노비가 많았는데 노예를 잃은 주인들 비방이 자자했다. 신충원 또한 지나치고 거슬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 때문에 끝내 금부에 잡혀 형을 백여 차례 받고 사면이 있어도 풀려나지 못하였다. 이후 신충원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없으니 그 인생이 새재 골짜기에 무성한 물박달나무와 다를바가 없었다(無用). 오늘 새재를 걸었다. 역사를 걸었다. 답습해선 아니될 역사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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