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아침을 열며-“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02 14:3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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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μακάριοι οἱ ἐλεήμονες, ὅτι αὐτοὶ ἐλεηθήσονται.)(마태 5:7)

‘긍휼’(矜恤), 좀 낯선 말이다. 요즘 이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불쌍히 여김’이라고 나온다. 그러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이 말을 자기가 직접 행하는 일은 결코 그렇게 쉽지 않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이 말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게 사람들에게 쉽지 않다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는 반증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긍휼이란 나 아닌 남에 대한 나의 태도요 자세요 행위이다. ‘타인’(=남)에 대한 시선이 이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내재돼 있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철학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았던 ‘타자’(l’autre)라는 게 이미 2000여년 전 예수의 철학에 등장하는 셈이다. 그 타인의 사정을, 특히 그의 딱한 사정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게 바로 긍휼이다. 이 ‘긍휼’은 저 유명한 맹자의 이른바 사단칠정에 등장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도 다르지 않다. 맹자는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라고 말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아예 사람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측은지심이 이른바 ‘인’(仁, =사랑)의 단초다(惻隱之心 仁之端也)라고도 말했다. 나는 이 말을 공감하고 지지해 마지않는다.

생각해보자. 예수도 맹자도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사람들은 보통 ‘자기’(=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건 어느 정도 양해될 수 있다. 인간이 각각 개체인 이상 그건 원리나 본능에 속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인간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타자들과의 ‘공동존재’(Mitsein)가 애당초 인간의 존재구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로빈슨 쿠루소의 이야기가 그걸 상징적으로 잘 말해준다. 그런데 바로 그 타자들에게 ‘불쌍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불쌍한, 가련한, 딱한 사정, … 한도 끝도 없다. 중국의 지하철 등에 부착된 양보문구의 저 ‘老弱病残孕’(노-약-병-잔-잉)도 그 구체적 사례다. 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는 예수의 말에 나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도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을 생각해 보면 역시 불쌍한 사람들이다. 나는 예전에 어떤 글에서 솔로몬의 말을 패러디하여 “불쌍하고 불쌍하며 불쌍하고 불쌍하니 모든 이가 다 불쌍하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쌍함의 보편성을 지적한 것이다. 부처가 말한 소위 2고 3고 4고 8고 그리고 108번뇌가 그 근거였다.

그런데도 그 불쌍함을 사람들은 잘 보지 않는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타인의 불쌍함은 안중에 없다. 그런 경향과 태도를 나는 ‘나만주의’라며 질타하기도 했다. 예수와 맹자의 제자로서.

예수는 ‘나만’ 생각하는 그런 보통사람들과 달리 ‘불쌍한 사람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아니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그는 단지 눈길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발길과 손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아들’인 것이다.

누구나가 예수처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눈길과 발길과 손길을 보내는 그런 일들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기대한다. 어디 슈바이처와 테레사 수녀 뿐이겠는가. 나는 그런 수많은 훌륭한 분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무한한 존경심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평범한 개인들에게는…그것까지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른바 ‘이타’는 언감생심이다. 나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까지 훌륭한 존재가 못 된다.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보통사람들에게는 부담이다. 오직 소수의 드문 자들(die Wenigen)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훌륭함이 돋보이는 것이다. 그래서다. 평범한 개인들의 경우는…최소한 남을, 타인을 불쌍하게 만들지만 말기를 … 나는 기대한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 라는 게 최근 나의 가치관이다. 현실을 보라. 무수한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들을 괴롭히거나 위해를 가해 남들을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갑질, 괴롭힘, 악플, 사고, 범죄, 살인, 테러…등등등.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렇게 불쌍해진 존재들을 좀 불쌍히 여기자. 그러면 우리도 불쌍히 여김을 받을 거라고, 즉 보상을 받을 거라고 예수가 보장했다. 누구로부터? 아마도 ‘신으로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이전에 ‘다른 누군가로부터’일 것이다. 그것은 작지 않은 구원이 된다. 잊지 말자. “불쌍하고 불쌍하며 불쌍하고 불쌍하니 모든 이가 다 불쌍하도다” 불쌍함에서 예외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긍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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