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행운을 담을 그릇
시론-행운을 담을 그릇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02 14:3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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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행운을 담을 그릇

김영삼 정부 때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는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였다. 1947년부터 3년간 미국 정보장교로 서울에서 근무했고, 1950년대 말에는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1977년, 그가 조지아 주 애틀란타의 에모리대학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건강을 위하여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 하던 그는, 길가의 공원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까워져서 2년여 동안 친근한 말벗이 되었고, 서로의 개인사를 잘 모르는 채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어느 날 출근길에 노인이 보이지 않자 레이니는 그 집을 방문했고, 노인이 바로 전날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장례식장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노인이 다국적 기업 ‘코카콜라’의 창업자 우드러프(Robert Woodruff) 회장이었음을 알게 됐다. 한 사람이 그에게 노인의 유서를 전했다. 놀라운 유언이 거기 담겨 있었다. “당신은 2년이 넘도록 내 집 앞을 지나다니며 나의 말벗이 되어준 친구였소. 우리 집 뜰의 잔디를 깎아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사양만 할 수 없었던 레이니는, 무려 4조원에 달하는 그 거금을 모두 에모리대학의 발전기금으로 출연했으며, 그 자신도 이 대학의 총장을 지내면서 끝까지 헌신했다. 미국 대학사상 역대 최고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에모리대학은 급성장하여 남부의 명문이 되었다. 16년간 총장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대학의 대학원은 ‘레이니대학원’으로 명명되었다. 총장직을 마친 1993년부터 4년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되었고, 한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대사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반추하고 있는 레이니의 이 실화는, 우리에게 삶의 도정을 걸어가면서 꼭 익혀야 할 몇 가지 가르침을 전해준다. 먼저 우드러프 회장에 관해서다. 그렇게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레이니라는 사람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처럼 큰돈을 ‘친구’에게 남길 수 있었을 터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레이니의 행위에 관해서다. 평소의 따뜻한 마음과 선한 행동으로,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운 응답이 상상도 못한 선물이 되어 되돌아왔다. 이것은 결코 황금광 시대의 금맥도 자본주의 시대의 일확천금도 아니다. 또 있다. 그와 같은 평소의 인품뿐만 아니라, 그러한 거금을 뜻있고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돈을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우드러프 회장이 단순히 ‘친구’라는 인식만으로 레이니에게 전 재산을 남겼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레이니의 행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회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 오는 것처럼, 참된 행운은 스스로 예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행운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온다.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소식이지만, 대책 없이 큰 복권에 당첨되었다가 마침내 패가망신 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준다. 행운과 축복을 기다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꿈이다. 하지만 평소의 ‘마음가짐’을 통해 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가난한 무명의 시절 교회 창고에 살면서 생쥐를 벗 삼아 미키마우스를 발굴한 월트 디즈니, 온갖 실패와 좌절을 딛고 상상의 세계 가운데서 해리 포터를 탄생시킨 조앤 롤링은, 모두 현실의 어려움을 미래의 소망으로 가꾸는 그 마음가짐을 가졌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된 이 첫 시기에 우리에게 무슨 행운이 없을까하고 기대한다면, 그에 앞서 평상시에 받을 그릇부터 먼저 준비해야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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