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박쥐와 바이러스
아침을 열며-박쥐와 바이러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05 16:4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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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
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박쥐와 바이러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박쥐를 갖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동네에 박쥐가 참 많았던 것같다. 학교 창고에도 향교 대들보 구석에도 박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쩌다 잡힌 박쥐는 말랑말랑한 게 그 감촉이 참 좋았다. 그렇게 박쥐를 주무르고 있다 보면 동네 할머니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어김없이 달려들어 박쥐를 빼앗아 던져버리고, 손을 씻기고, 씻긴 손을 불에 쬐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들은 더러운 재앙이 붙었다고 연신 침을 ‘퉤퉤’ 뱉었다.

과학이 발달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머니들의 그런 행동은 참으로 지혜로운 경험칙이었던 같다. 뭔가 알 수 없지만 박쥐를 만지면 재수 없고 병에 걸리기 쉽다는 경험칙 말이다.

사람 몸에 치명적인 질병을 안겨주는 바이러스는 그 종류가 다양하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박쥐를 숙주(宿主)로 하여 기생하는 바이러스는 사람에게 더욱 해롭다. 이런 것을 당시 할머니들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예전의 사스(SARS) 바이러스, 에볼라(Ebola) 바이러스, 폐렴의 주원인인 헨드라(Hendra) 바이러스, 뇌염을 일으킨 니파(Nipah) 바이러스 등도 모두 박쥐를 매개체로 하였다는 조사결과들이 있다. 하여 비록 학교에서 배운 바는 적었지만 생활에서 관찰 체득한 옛날 사람들의 지혜가 얼마나 빛났던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가방끈은 길고 배운 콘텐츠는 많으나 상대적으로 삶의 지혜는 초라한 지금의 사람들에 비추어 볼 때,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그 옛적 동네 ‘할매’들이 지금 참으로 빛나고 그립다.

박쥐는 초음파를 발사하여 빛이 없이도 사물과 지형지물에 막힘없이 어둠 속을 자유자재로 날며, 비행기 로켓 헬리콥터 드론 등 ‘날 것’ 연구가들이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비행체의 롤 모델’이다. 박쥐의 비행구조, 파장 감지 시스템, 외부 기상과 기온에 천부적으로 적응하는 상황적응력은 지금도 계속 연구 중이다. 이런 박쥐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역시 그 생존방식을 살펴보면 탄복을 자아낸다. 마치 탁월한 인공지능(A.I.)의 화신인 냥 핵산과 단백질을 기본으로,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공(球)의 형태로 다양하게 결합하여 동물·식물들 여러 생명체에 착 달라붙어 살아간다. 이때 면역력이 약한 생명체는 죽고 만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무섭고 두려운 박쥐 바이러스도, 배추벌레가 자기 생존터전인 배추잎을 다 갉아 먹지는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그가 살아가야 할 생존 터전인 박쥐를 결코 죽이지 않으며, 박쥐의 생체여건에 따라 변용하여 기생한다.

인간은 자기 생존 터전을 스스로 파괴·오염시켜 나가면서 이를 발전 성장이라 자화자찬하며 뿌듯해 한다.

이러한 다양한 변형체의 바이러스가 박쥐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옛날 우리 동네 ‘할매’들은 알고 계셨을까?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박쥐를 만지면 해롭다는 것만은 분명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속속들이 알지 못하여 ‘귀신’이 붙어서 그런 줄로만 미루어 짐작하고, 막연히 ‘두렵고’, 또 ‘무서워’ 하였던 것이리라.

우리말에는 재밌고 슬기로운 말들이 참 많다. ‘두렵다’는 것은 대상이나 사물을 모를 때 생기는 감정이다. 깜깜한 밤이 두렵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여 두렵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두렵고, 내가 무식하여서 두렵다. 즉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포감이다. 하지만 까닭과 결과와 실체를 알게 되면 일단 두려움은 사라진다. ‘무섭다’는 것은 대상이나 사물의 실체를 알더라도 이를 다스리거나 통제하거나 제거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공포감이다. 호랑이의 실체를 알더라도 내가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무섭다.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면 호랑이는 전혀 무섭지 않은 장난감에 불과하다. 비록 미친 권력자의 실체를 내가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엄청나게 무섭다. 그러나 이 미친 권력자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

1880년 현미경이 정밀화 일상화되기 이전에는 ‘바이러스(0.01-0.2 마이크로미터, 광학현미경으로 관찰 불가능, 전자현미경으로만 가능)’, ‘리케차(0.3-0.5 마이크로미터, 광학현미경으로 관찰가능)’, ‘세균(박테리아, Bacteria, 1마이크로미터 이상, 광학현미경 관찰가능)’ 등은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이를 ‘귀신의 작용’, ‘신의 섭리’라고 믿고서, 굿과 푸닥거리를 하고, 기도와 치성을 드리고, 부적을 붙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1898년 바이어링크(M.W. Beijerlink)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독성물질’을 라틴어로 ‘바이러스(Virus)’라고 이름 붙이고 나서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다. 2020년 2월 현재도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여전히 통제불능의 구석이 있기에 아직은 ‘무서운’ 대상이다. 어떻든 각자 조심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란 전자현미경으로 볼 때 바이러스의 돌출표면 모습이 왕관(CROWN, CORONA)처럼 보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루빨리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이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무서움’이 없고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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