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 ἐὰν δὲ τὸ ἅλας μωρανθῇ, ἐν τίνι ἁλισθήσεται; εἰς οὐδὲν ἰσχύει ἔτι εἰ μὴ βληθὲν ἔξω καταπατεῖσθαι ὑπὸ τῶν ἀνθρώπων.)(마태 5:13)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 9:50)
산상수훈에서 보이는 예수의 이 ‘소금론’은 다소 특이하다. 다른 어떤 ‘가치론’에서도 소금이 등장하는 예는 별로 본 적이 없다. 특히 요즘처럼 염분 과다섭취로 사람들이 건강을 해치고 이른바 저염식이 권장되는 상황에서는 예수의 이 소금론이 악의적인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른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2천여 년 전의 예수가 그런 염분(Na)의 폐해를 몰랐다고 해서 그게 그의 신성 내지 권위 혹은 가치에 흠집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가 말하는 이 ‘소금’은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라는 말이 그것을 알려준다. 소금은 ‘좋은 것’의 상징인 것이다. 맛도 맛이려니와 그것이 생명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무기질인 것도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개는 다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금이 좋은 것임은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그 ‘좋음’의 내용이다. 그 ‘의미’다. 나는 여기서 ‘맛’이라는 말과 ‘쓸데’라는 말을 주목한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말과 ‘화목’이라는 말을 주목한다.
좀 뚱딴지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을 저 공자의 ‘정명론’ 및 플라톤의 ‘정의론’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공자의 정명론은 군-신-부-자로 대표되는 각각의 신분들이 각각 제 자리에서 자기 이름값을 제대로 해서, 즉 자기 역할에 충실해서, 온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플라톤의 정의론은 지도자-수호자-생산자로 대표되는 각각의 신분들이 각각 자기의 덕을 실현할 때 종합적으로 국가의 덕인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름’(名)과 ‘덕’(arete)이 예수가 말한 ‘맛’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게 ‘좋은 본질’인 것이다. 그게 각각 공자가 생각하는 ‘천하’, 플라톤이 생각하는 ‘국가’, 그리고 예수가 생각하는 ‘세상’을 ‘좋은’ 것으로 만드는 ‘쓸데’(=쓸모), 즉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누구든 입으로는 당위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을 보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이름들도 많지가 않고, 덕을 제대로 실현하는 계급들도 많지가 않고, 짠 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할 인간들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짜야 할 소금이 시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특히 달고자 하는 강한 경향을 갖는다.) 삶이라는 음식을 먹기 좋도록 짜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맛을 잃는 것이다. 그 결과는? 버려져 밟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의미 내지 존재가치의 상실’로 해석한다. 요즘의 세상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원래는 모두가 소금이었으되 그 짠 맛을 잃어버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소금,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니, 쓸데없는 정도가 아니라 독소만 남아 사람과 세상의 건강을 해치는 ‘나쁜 소금’들도 너무나 많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짠 맛을 내는 (혹은 내려는) 그런 소금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금이 여러 음식재료들을 버무려 하나의 맛있는 요리로 만들어내듯이 사람과 사람을 서로 버무리는 역할을(=기능)을 수행한다. 그게 바로 예수가 말한 ‘화목’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각자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자. 나는 과연 소금인가. 나는 과연 짠맛을 내고 있는가. 사람들을, 세상을 먹을 만한 음식으로 만들고 있는가? 혹 그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나는 그 답을 눈물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면, 그 눈물에서 짠 맛이 난다면, 그는 소금이다. 그런 소금은 예수가 요리하는 맛있는 세상을 위해 아마 요긴한 양념으로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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