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아침을 열며-“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09 15: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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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 ἐὰν δὲ τὸ ἅλας μωρανθῇ, ἐν τίνι ἁλισθήσεται; εἰς οὐδὲν ἰσχύει ἔτι εἰ μὴ βληθὲν ἔξω καταπατεῖσθαι ὑπὸ τῶν ἀνθρώπων.)(마태 5:13)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 9:50)

산상수훈에서 보이는 예수의 이 ‘소금론’은 다소 특이하다. 다른 어떤 ‘가치론’에서도 소금이 등장하는 예는 별로 본 적이 없다. 특히 요즘처럼 염분 과다섭취로 사람들이 건강을 해치고 이른바 저염식이 권장되는 상황에서는 예수의 이 소금론이 악의적인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른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2천여 년 전의 예수가 그런 염분(Na)의 폐해를 몰랐다고 해서 그게 그의 신성 내지 권위 혹은 가치에 흠집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가 말하는 이 ‘소금’은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라는 말이 그것을 알려준다. 소금은 ‘좋은 것’의 상징인 것이다. 맛도 맛이려니와 그것이 생명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무기질인 것도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개는 다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금이 좋은 것임은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그 ‘좋음’의 내용이다. 그 ‘의미’다. 나는 여기서 ‘맛’이라는 말과 ‘쓸데’라는 말을 주목한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말과 ‘화목’이라는 말을 주목한다.

소금이 그러하듯이 사람에게도 ‘맛’이라고 하는 ‘쓸데’(=쓸모)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의 ‘맛’? 그게 뭘 뜻하는 걸까. 그냥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여기엔 하나의 철학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소금의 맛은 ‘짠’ 것이다. 짜게 하는 것이, 짜게 해서 맛있게 만드는 것이 소금의 ‘쓸데’인 것이다. 그것은 소금의 ‘본질’ 혹은 ‘본질적 기능 내지 역할’이다. 바로 그런 ‘본질’ 내지 역할이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은 사람도 소금처럼 그 본질에 충실하라는, 충실해야 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쓸모없어 버려진다는 것이다.

좀 뚱딴지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을 저 공자의 ‘정명론’ 및 플라톤의 ‘정의론’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공자의 정명론은 군-신-부-자로 대표되는 각각의 신분들이 각각 제 자리에서 자기 이름값을 제대로 해서, 즉 자기 역할에 충실해서, 온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플라톤의 정의론은 지도자-수호자-생산자로 대표되는 각각의 신분들이 각각 자기의 덕을 실현할 때 종합적으로 국가의 덕인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름’(名)과 ‘덕’(arete)이 예수가 말한 ‘맛’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게 ‘좋은 본질’인 것이다. 그게 각각 공자가 생각하는 ‘천하’, 플라톤이 생각하는 ‘국가’, 그리고 예수가 생각하는 ‘세상’을 ‘좋은’ 것으로 만드는 ‘쓸데’(=쓸모), 즉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누구든 입으로는 당위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을 보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이름들도 많지가 않고, 덕을 제대로 실현하는 계급들도 많지가 않고, 짠 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할 인간들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짜야 할 소금이 시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특히 달고자 하는 강한 경향을 갖는다.) 삶이라는 음식을 먹기 좋도록 짜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맛을 잃는 것이다. 그 결과는? 버려져 밟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의미 내지 존재가치의 상실’로 해석한다. 요즘의 세상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원래는 모두가 소금이었으되 그 짠 맛을 잃어버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소금,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니, 쓸데없는 정도가 아니라 독소만 남아 사람과 세상의 건강을 해치는 ‘나쁜 소금’들도 너무나 많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짠 맛을 내는 (혹은 내려는) 그런 소금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금이 여러 음식재료들을 버무려 하나의 맛있는 요리로 만들어내듯이 사람과 사람을 서로 버무리는 역할을(=기능)을 수행한다. 그게 바로 예수가 말한 ‘화목’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각자 자기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자. 나는 과연 소금인가. 나는 과연 짠맛을 내고 있는가. 사람들을, 세상을 먹을 만한 음식으로 만들고 있는가? 혹 그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나는 그 답을 눈물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면, 그 눈물에서 짠 맛이 난다면, 그는 소금이다. 그런 소금은 예수가 요리하는 맛있는 세상을 위해 아마 요긴한 양념으로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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