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단재 신채호(申采浩)
진주성-단재 신채호(申采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12 16:0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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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단재 신채호(申采浩)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저술, 투옥, 순국 이란 단어가 익숙하고 필요한 훌륭한 抗日鬪士(항일투사)라고 할 수 있다.

1880년 11월 7일생인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에 입교했으며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 투옥되었다.

1904년 신규식, 신백우 등과 함께 산동학원을 설립하고 문동학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다.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기자가 되어 매국을 성토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기호흥학회에 가입하고 대한협회 월보에서도 논설을 발표했다. 이 때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대동사천년사>등을 저술했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이 국외로 망명하자 동행했다. 1911년 12월 이상설, 최재형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주필이 되었다.

1912년 광복회를 조직할 때 부회장이 되었고 회장은 윤세복 선생, 총무에 이동휘 선생이었다.

1914년 윤세복의 동창학교에서 <조선사>를 저술했다.

1919년 4월 10일 29인의 모임에서 임시정부 발기인 대회에 참가했다.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였고 반대하면서 퇴장했다. 1919년 10월 신대한동맹단을 조직할 때 부단장이 되었다.

1920년 9월 박용만, 신숙 등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추구하기도 했다. 1923년 4월 1일 의열단 투쟁을 위해 조선혁명선언서를 집필했다.

이어 1923년 5월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가 되어 새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해 호응을 얻었다.

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등을 집필해 발간했다.
북경에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대회를 개최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무력 투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일경에 피체(被逮)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혼절했다.

일본 판사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0년형이 언도되어 1936년 2월 11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묘소와 기념관이 청주시 낭성에 있으며 93년에 도기념물 90호로 지정됐다.

신채호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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