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진주성-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13 16:2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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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정순(貞純)왕후(1440-1521) 조선단종의 비성은 송(宋) 여랑부원군 현수의 딸 1454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455년 의덕왕대비가 되었으나 1457년 부인으로 강봉됐다. 그 후 1698년 단종의 신위(神位)와 함께 창경궁에 옮겨 모셨다. 능은 사능(思陵)이다. 윤사로라는 자가 있었다.

단종 즉위 때부터 왕릉을 지키는 수능관에 임명돼 계절마다 단종으로부터 옷을 하사 받던 자였다. 1457년 음력 10월 24일 단종이 영월에서 죽던 날 윤사로가 이렇게 주장했다. 역신들의 딸들은 공신에게 주어야 한다. 나는 송현수의 딸을 원한다. 윤사로가 탐한 송현수의 딸이 바로 단종의 비 정순왕후다. 사관이 이렇게 썼다. ‘성질이 잘고 남의 재물을 빼앗는 자였다’ 다른 여자의 남편에 의해 자기 남편을 잃은 여자 정순왕후 송씨는 광릉에서 15km거리 언덕에 묻혀있다. 사능(思陵)이다. 왕후에서 노비로 추락한 송씨는 양반집으로 서울 동대문 정업원에 얹혀살았다.

왕실에서 주는 도움을 끝까지 거부 동냥질과 염색질로 끼니를 잇고 살았다.(세조는 노비라도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명했다.) 그녀가 울면 동네 아낙은 같이 울었다. 아낙들은 금남(禁男)의 야채시장을 열어 송씨에게 몰래 먹을 것을 조달했다. 왕과는 2년 함께 살았지만 왕후는 모질고 파란만장하고 오래 살았다.

원수 세조가 죽고 시사촌인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았다. 세조 앞잡이로 나섰던 모사꾼 한명희가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 당하는 꼴도 보았다. 그리고 중종1년(1516) 영월에 있던 남편묘에 봉분이 세워지고 제사가 치러졌다. 남편사후 57년만이다. 그 모든 역사적 풍경을 지켜보고서 5년뒤 그녀가 죽었다. 여든한 살 이었다. 자식이 없어 죽은 그녀를 위해 단종의 누나인 경혜옹주가 자기 시댁인 해주정씨 선산에 그녀를 묻었다.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녀 또한 복위됐고 무덤 또한 왕릉으로 격상돼 사릉(思陵)이라 호칭되었다.

송림 한쪽에 사돈댁에 유택을 내준 선한 해주 정씨 사릉은 남향 남편이 잠든 장릉은 동쪽, 1999년 남양주시에서 사릉에 있던 소나무 한그루를 장릉으로 옮겨 심었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정령송(精靈松)이라한다. 이 나무 또한 굳게 자라지 못하고 야위어 있으니 생전에 겪은 고초에 영혼이 지쳐버린게 아니였을까. 전국에 있는 왕릉 송림에 소나무를 공급하는 양묘장도 이곳 사릉에 있다. 그녀의 남편 단종을 죽인 시삼촌 세조의 광릉에서 자동차로 15분이 걸리지 않는다. 산자락에 빛줄기가 떨어지니 그녀의 길고도 모진 삶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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