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쉼표가 있는 삶
시론-쉼표가 있는 삶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16 14:3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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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쉼표가 있는 삶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다” 고(故) 황순원 작가의 말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은 대패질을 하는 시간에 대한 준비이며 그 실전을 위한 휴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작가로서의 창작 방식에 대한 비유적 언급이었으나, 세상을 살아갈수록 우리 삶의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날선 교훈이라 여겨진다. 벌목장의 인부가 열심히 도끼질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쉬는 시간을 갖고 도끼날을 갈며 기름을 바르는 것이 훨씬 더 일의 능률을 올리는 길이라는 사실과도 같다.

필자가 포항 해병사단에서 군 복무를 하던 때의 일이다. 이런저런 연유로 부대 내 휴게실을 새롭게 꾸미는 임무가 맡겨졌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다 온 전우 한 사람과 여러 날을 고민했는데, 그중에서도 정면 벽면에 어떤 구호를 내걸까가 중심 화두였다. 우리는 해병대의 진취적 정신과 휴게실의 본질적 기능을 조합하여 이렇게 정했다. “오늘의 휴식, 내일의 전투력” 지금 생각해 보면 휴식이 전투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어리바리한 사병들로서는 썩 잘된 아이디어였고, 그래서 그런지 그 콘셉트로 완성된 휴게실은 부대 내의 칭송을 받았다.

쉬지 않고 높은 산을 오를 수는 없다. 개별의 사람이나 공동체나 쉬면서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구상하는 과정을 갖지 못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갖기 어렵다. 일본의 혼다 기업 창업자 혼다 쇼이치로는 “휴식은 대나무에 비유하자면 마디에 해당한다”고 했다. 마디를 맺어가며 성장해야 키 큰 대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기업도 중간 중간에 쉬는 구간을 가져야 강하고 곧게 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주 자체가 어렵던 옛날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나, 지금은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전혀 다른 조어(造語)가 일반화 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중요한 일이다. 휴식이 곧 생산성의 요람이라는 개념의 실상이 거기 있다.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제동장치가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다. 그만큼 위험하다. 그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톨스토이 소설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이 있다. 어느 농부가 동이 튼 후 해질 때까지 하루 동안 발로 밟고 표식을 해둔 땅을 모두 주겠다는 약속, 그러나 해지기 전까지 출발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모두 무효라는 규칙을 함께 받았다. 결과적으로 농부는 그날 출발선으로 돌아왔으나 기진맥진해 죽었다.

그에게는 쉼표가 없었다. 그 쉼표는 욕심을 버릴 때에만 눈에 보이는 신비한 문자인지도 모른다. 농부의 죽음을 부른 과욕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고 자신과 연동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에 필적하는 고통을 부가한다.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이 그로 인해 지옥과 천국을 오간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 자리의 휴식, 그 쉼표가 우리의 삶에 선사할 수 있는 최상의 복원력을 말한다.

1999년 이탈리아의 한 지역에서 시작된 슬로시티(slow city)운동이란 것이 있다. 슬로푸드 먹기와 느리게 살기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지식정보화 시대의 쾌속성에 맞서 지역사회의 환경을 재조정하자는 취지를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0여 개의 도시가 여기에 가입하고 있다. 문제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누리는 삶의 질이요 수준이다. 필자가 살아온 삶의 환경은 늘 반(反)슬로시티에 해당했고 온 세상의 다툼이 한껏 고조에 달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계기로 ‘쉼’의 문제에 그야말로 전혀 새롭게 접근해볼 참인데 글쎄, 그다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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