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아침을 열며-“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16 15: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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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교수·철학자-“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4~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누가 8:16~17)

‘빛’은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조사를 해보니 (‘빛나다’를 포함해) 마태복음에 10번, 마가복음에 1번, 누가복음에 9번, 요한복음엔 무려 24번이나 등장한다. 예수 본인도 이 말을 즐겨 입에 올린다. 위에 인용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요한복음에는 이 빛이 예수 자신에 대한 상징으로 언급되어 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 8:12) 그러나 인용한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문맥을 보면 이것은 결국 ‘착한 행실’과 연결된다. 빛은 ‘선’(善)의 상징인 것이다. 그게 이미 전제로 되어 있다. 그러니 그 자체가 빛이라 할 수 없는, 즉 선하지 못한 사람은 이 말과 아예 상관이 없다.

누구든 자신이 과연 빛인지, 과연 선한지, 당당하게 예수의 곁에 다가갈 수 있을지, 주저되는 바가 없지는 않겠지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를 ‘그리 되라’는 격려로 생각하고 이 말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예수의 이 말이 ‘빛’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점이 빛을 보이게 함, 보게 함에 찍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는 숨은 것을 드러나게 하고 감추어진 것을 알리고 나타나게 하라고 제자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은둔 혹은 은자를 일종의 가치 내지 미덕으로 생각하는 동양적 전통에서는 이러한 보이게 함, 보게 함, 알림, 나타냄, 드러냄이 마음을 좀 편치 않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가 이런 말을 한 데는 까닭이 있다. 요즘 시대에 유행하듯이, (자칫 역겨울 수도 있는) ‘자기 PR’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 나가 선한 행실을 하라는 말이다. 그것을 보이라는 말이다. 선한 행실은 그 자체가 빛이기 때문에 본질상 감추거나 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높은 곳에 두어 전체를 환히 밝혀야 하는, 볼 수 있도록 하는 책무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 당연하고 뻔한 말을 예수는 왜 한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 씩이나 되는 존재가 이 말을 굳이 한 데는 까닭이 있다. 그 선한 행실을 통해(즉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런 행실을 보고 ‘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선하구나’ 하는 것을 알아 하나님을 빛나게 하라는 말이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아주 당연한 말이다. 이 말에는 또 다른 까닭이 있을 수도 있다. 확대해석이지만, 이 말의 배경에는 빛이 빛을 보지 못하는(=드러나지 못하는, 어둠이 빛을 가리는), 빛이 빛을 숨기는, 그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실은 그렇다. 은둔과 은자가 미덕으로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인간 세상에 빛이 가려지는 그런 강력한 경향이랄까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의 절반은 어둠이 지배한다. 밤의 존재가 그것을 상징한다. 환한 대낮에도 모든 존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그것을 밝히라고 예수는 독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격려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사람의 빛을 드러내는 것도 ‘등경(=등잔대) 위에’ 두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상의 밤을 밝히고 대낮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한다.

언론도 교육도 출판도 예수가 말한 그 ‘너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든지’ 그 너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도 교육도 그리고 교회도 지금 과연 스스로 빛인지, 혹은 빛을 제대로 조명해주고 있는지 점검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의 이 말이 사람들의 귀를 울린 지 2천년도 더 지난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그다지 밝지 못하고 빛은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그릇으로 덮여 있고, 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둠 속을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너희들’이 사그러드는 등잔의 심지를 돋우고 그것을 높은 등잔대 위에 자리 잡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우선 가장 먼저 ‘예수’라는 등불을 이 책이라고 하는 등경 위에 올려둔다. 예수는 빛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는 이만한 빛이 없다. 가릴 수 없는 빛이다. 그의 빛으로 부디 세상이 밝았으면 좋겠다. 밝은 범위가 한 뼘이라도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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