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 학생운동 조삼수(趙三壽)
진주성-항일 학생운동 조삼수(趙三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19 16:3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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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 학생운동 조삼수(趙三壽)

조삼수 선생은 진주시 옥봉동 561번지에서 1912년 11월 17일 태어나 진주제일보통학교 제 18회 졸업생이다. 1929년 3월 24일 졸업했다.

진주공립농업학교 재학중 송기호 등과 동맹휴교를 단행해 박봉찬, 공기현, 옥재수 등과 함께 소행불량으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시위할 때 격문 1216장을 작성해 1931년 2월 28일 진주 시내로 진출하여 사방에 배포했다.

<동아일보>1931년 6월 2일 4일 10일자 등에 의하면 조삼수 선생은 손태준, 옥재수, 박봉찬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손태준 선생은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조삼수 옥재수 등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진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조삼수 선생은 1932년 9월 16일 진주시 봉곡동에서 송기호, 장호관, 박원지, 박호종, 김점봉, 이사덕재(이덕재)강석문(강덕문)등과 함께 지방협의회 적색노동조합 건설위원회, 학생위원회, 노동위원회 3개 부문으로 나누어 농촌, 공장, 학교 등에 조직을 두고 협의회를 확대 강화하기로 협의하고 결의했다.

각 협의회 마다 책임자를 두고 매월 6일 16일 26일 마다 회합을 개최하기로 했다.

목적 수행을 위해 11월 7일을 기해 동맹휴교를 단행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격문 15종 수 백장씩 인쇄하여 배포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발각되어 17명이 모두 피체되고 말았다.

조삼수 이사덕재 선생 등은 농민조합 건설위원회 책임자라는 이유로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 피를 토하고 혼절하였다.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공판을 받고 징역 2년형이 언도되고 1933년 10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진주지청에서 함께 재판을 받은 이들은 다음과 같다.

송기호, 장호관, 박원지, 조삼수, 김상기, 김호배, 이사덕재, 김점봉, 윤태곤, 박희몽, 정성수, 박용규, 정화표, 김종환, 박재권, 박호종 등이며 이사덕재 이하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조삼수 선생, 박원지 선생, 박재권 선생, 박호종 선생, 이사덕재 선생 등 5명은 진주 출신이기 때문에 2001년 12월 진주시 금산면 항일투사 추모비를 세우고 공적과 성명을 깊이 새겨 두었다.

비문은 추진위원장인 필자가 쓰고 비문 글씨는 강용순 님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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