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고단한 삶
시와 함께하는 세상-고단한 삶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2.26 16:09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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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고단한 삶

말하자면 밤의 척추처럼
주상복합 아파트를 돌며 차츰 커지는 붉은 몸뚱어리

최저 시급을 수거하는 그의 책무는
무분별하게 유출된 대형마트 카트를 운반하는 일이다

연결고리로 단단히 묶여있는 어제와 오늘

수십 개의 발이 일제히 바닥을 굴린다
어긋나게 놓인 보도블록 위
지네 한 마리 지나간다

밀어붙이는 힘에 따라 휘어지는
등뼈 각도 그 쏠림이
코너를 돌 때마다 좌우로 요동치고

사내의 눈썹이 수심 가득
고층 외벽을 천천히 오르내린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심호흡이
어둠을 뚫고 흩어질 때
잠시 둥글어지는 사내의 무척추

하루의 전모가
달의 폐곡선 속으로 스캔되는 순간이다

내일의 바코드는 내일의 분량

야삼경
매지구름 한 점이
달무리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천융희, ‘달의 폐곡선’)

폐곡선이라 하면 출발점과 도착점의 위치가 일치하는 선분을 말한다. 달의 모양은 원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폐곡선이 될 수 있다. 달과 폐곡선의 이미지를 말하면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달은 밤 시간대를 상징하기 때문에 늦은 시간이라는 점, 즉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출발점이 도착점이기 때문에 언제나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일종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단순한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 시는 밤늦게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으로 달궈지는 대형상점의 카트를 모으는 노동자의 애환을 노래하는 장면이다.

아파트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커팅머신을 모아서 대형상점으로 이동하는 일은 정말 고단한 일이다. 시계추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서 같은 형식이 반복되는 일과(日課), 긴 커팅머신의 행렬을 끌고 올 때마다 힘껏 밀어야 하는 것도 힘들지만, 대로의 코너를 돌 때면 중심을 잡기도 쉽지 않다. 그것은 거대한 지네가 움직이듯 카트의 마디마디가 길게 연결된 것이 끌고 단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작업이다. 더구나 고층 아파트까지 올라간 커팅머신을 끌고 와야 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일을 반복하는 단순 노동을 상징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두 번씩이나 올 수 없어서 무리하게 긴 카트의 행렬을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지고 있다.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또 이렇게 아르바이트를 해야 만이 생활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바코드의 분량이 달무리 언저리에 곧 비를 뿌릴 듯한 매지구름이 배회하고 있듯 어려움의 영속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이 긴 터널도 끝이 날 것이며 밝은 세상도 찾아올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듯한 지네 한 마리, 등뼈가 휘어지는 각도, 심장이 터질 듯한 호흡, 등을 통해 노동자의 고담함을 서술했다면, 그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 비를 머금은 매지구름 즉 피곤한 서민들의 눈물을 형상화한 것은 아닌지…하지만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시대적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그래서일까 힘들었지만, 예전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한다면 안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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