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아침을 열며-“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3.01 15: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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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 6:3~4)

해마다 연말이면 누군가가 구세군 냄비에 거액을 익명으로 넣어 화제가 되고는 한다. 그는 아마도 예수의 이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 거라 짐작된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런 분들은 어쩌면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하는 것조차 기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아마 완전한 의미일 것이다. 철학에서는 그런 것을 필요충분조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행위에 대해 다른 이유, 다른 조건이 필요없다는 말이다. 선행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이런 모습을 무한한 존경심으로 우러러본다.

말이야 쉽다. 하지만 이런 실천이 어디 쉬운 일인가. 구제, 즉 남을 도와주는 것, 혹은 선행, 그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귀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은 대부분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고 그런 자기를 남들이 알아주기 바란다. 예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한다.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탓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했겠는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보여주기식’구제가 꼴불견이기 때문이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떠벌리기도 한다. 그런 것을 우리는 ‘생색’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건 그나마 있는 공조차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공을 스스로 지우는 지우개와도 같은 것이다.

이런 꼴불견이 세상에는 적지 않게 있다. 그건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구제 내지 선행의 경우뿐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자기를 드러냄’이 다 그렇다. 나는 어떤 훌륭한 학자 한 분을 알고 있다. 그분은 정말 많은 노력을 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흔치 않은 수준에 도달한 분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한이 맺혔는지 그 발언들은 절반 이상이 자기과시 자기자랑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그 수준을 스스로 끌어내린다. 그 공을 그 자기과시가 다 까먹어버리는 것이다.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알아줌이 너무 없는 사회풍토 탓일까? 이해는 된다.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은 저 노자(老子)의 철학에도 예수의 ‘오른손 철학’과 비슷한 것이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핵심에 놓여 있다. 그는 자연에게서 그런 ‘겸양’의 태도를 배우고 있다. 이른바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가 그것이다. ‘공을 이루고 몸은 물러난다’ ‘공을 이루되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과 취지가 서로 통한다. 공으로 치자면 자연의 모든 것이, 아니 자연 그 자체가 다 공이다.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생명들을 살게 한다. 어마어마한 공이다. 그러나 자연은, 혹은 그 자연의 창조 및 주관자인 조물주는 그 공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다. 그래서 그 공을 잃지 않는다(夫唯弗居 是以弗去)고 노자는 일갈했다. 독일의 거철 하이데거는 그런 것을 존재의 ‘물러섬’(Entzug) 내지 ‘자기배제’(Enteignis)라 부르기도 했다.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떠벌이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남몰래 살짝 은밀히 주기만 하는 사랑이 없지는 않다. 저 구세군 냄비의 경우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의 사랑이 그런 것이다. 만유에 대한,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그런 것이다. 그 신의 아들인 예수의 사랑도 그런 것이다. 더할 수 없이 큰 거룩한 사랑이건만, 그들은 그 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새기고 또 새기며 수련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것을 ‘오른손의 철학’이라 부르고 있다. 예수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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