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법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시와 함께하는 세상-법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3.11 15:0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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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법음으로 세상을 밝히는

소리의 집
생이 무거워 늘 맞으며 사는가
소리의 나이테 쇠 문양에
몇 자 법문으로 둥글게 박힌다

울었던 시간을 다듬이질로 펴면
그 사리로 검은 벽면을 환히 밝힐 수 있으려나
동그란 부처의 미소가 소리 줄기에 살고 있을까
어둠을 잠재우는 소리의 집
감추었던 시간이 옷을 벗는다

맞을 때마다 떨어진 쇠비늘의 씨앗일까
하나 되기 위해 억 겹의 시간 생하고 또 멸하였다

맞으며 다져진 비단 속살
삼경의 행간을 굴러 굴러 세상으로 나간다
혼자서는 열 수 없는 길이네
빛이 되지 못한 침묵들이 검붉도록 맞아야
내 깊은 내륙까지 차오르는 너
용의 발톱에 매달려 천년을 울었구나

(백숙자, ‘범종’)

범종은 법고 목어 그리고 운판과 더불어 사물(四物)이라고 한다. 본래 사람들을 모이게 하거니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사용되었지만,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여러 의식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범종의 범(梵)은 더러움 없이 깨끗하다는 뜻이다. 시인은 불교 신자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정도로 범종을 자세히 관찰하고 섬세하게 묘사한 것을 보면 일반인의 시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범종은 범종각에 설치되어 있으며, 범종의 윗부분은 소리를 내는 음통과 용두로 되어 있고, 몸통은 소리를 돕는 유두와 절묘한 비천상으로 양각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예불 시간이 되면 당목이라는 도구로 범종을 치게 되는데 소리가 은은하고 아름다워 이로써 미혹한 중생들을 깨우치기도 한다고 하여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한 법음(法音)의 소리’라고도 한다. 그러니 이 소리는 또한 설법 소리 즉 사자후(獅子吼)를 하는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처럼 미몽(迷夢)에 사로잡힌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범종의 소리는 그러하지만, 그 범종의 구조물인 쇠는 어떨까, 시인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있다. 당목에 맞을 때마다 조금씩 쇳조각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범종이 울릴 때는 법문이 생(生)하지만, 그럴 때마다 범종에서 떨어져 나간 쇳조각은 조금씩 멸(滅)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억 겹의 시간 생하고 또 멸하였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범종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 고통과 희생으로 얻은 소리(德音)의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이렇게 오랜 고통의 시간 동안 자신은 조금씩 멸하면서 중생을 위한 덕(법음)이 생하니 그 귀한 덕으로 세상의 어둠을 잠재우고, 시간의 행간을 알려줌으로써 속세를 향한 가르침과 구도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즉 범(梵)으로부터 소리가 생(탄생)하지만 소리는 그 범을 떠나는 순간 바로 멸(죽음)이 되기 때문에, 고귀한 희생의 대가인 소리라는 형식이 세상의 미명인 색(현상계)을 밝혀준다는 것이 시인의 관점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그 희생의 대가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범종이 어두운 속세를 향해 헌신하기 위해서는 자신은 매일 맞아야 하고 또한 일년 365일 내내 용두(龍頭)를 통해 매달려 있어야 하는 운명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인들이야 범종의 소리에만 매료되지만, 그래서 시인은 범종이 아름다운 소리도 소리지만, 소리를 한번 낼 때마다 겪어야 할 소리의 과정에 더 주목했던 것이고 희생에 의미를 둔 것이다.

이런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감성을 가지고 있어야 관찰할 수 있다. 첫째, 범종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 즉,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이른바 인연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시인과 같은 감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모두에서 시인은 불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사물을 꼼꼼하게 불자의 눈으로 관찰한 시인의 예민함이 돋보이고 구절구절의 표현에서 미적 감각이 두드러진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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