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염려하지 말라…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아침을 열며-염려하지 말라…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3.15 15:3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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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염려하지 말라…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 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태 6:25~34)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의 발언들 중 이 말을 특별히 좋아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가장 핵심이지만, 그 뿐만도 아니다. 여기서는 목숨과 몸의 소중함, 인간의 귀함, 염려의 무력함, 들풀-들꽃의 아름다움, 의식주의 필요성, 천국과 그 의로움의 지향, 신에게 내맡김…등 예수 특유의 가치론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도 아주 문학적이다. 특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 같은 표현은 너무나 시적이어서 사람의 감성을 파고든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음미해보자. 이 말은 염려로 점철되는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을 생각해볼 때, 작지 않은 종교적-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 발언이 ‘신의 아들’에 의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사실 이 ‘염려’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만일 있다면 그는 어떤 특별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혹 부처나 장자가 그런 사람이었을까? 잘은 모르겠다. 내가 전공한 하이데거철학에 보면, ‘염려’(Sorge)라는 것을 아예 ‘인간의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한평생 염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는 알려준다. 염려-걱정이 인간존재의 근본구조에 속한다는 말이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쿠라’(cura, 걱정의 신) 우화를 인용하기도 하는데, 그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바로 그래서 예수가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늘에 맡기라’고. 하더라도 ‘내일 일까지 염려하진 말라’고. 혹자는 예수의 이 발언에 대해 ‘유비무환’ 정신에 반한다고, 무대책이 능사냐고,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설마하니 예수가 그걸 몰랐겠는가. 예수는 의식주에 대한 염려보다 더 숭고한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신의 나라와 신의 의(義)’라는 것이다. 그게 ‘먼저’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즉 의식주에 관한, 즉 ‘먹고사는’ 일에 관한, 그런 염려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건 하늘에 맡기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예수다운 면모다. 먹고 사는 걱정보다 의로움을 우선하는 이런 면모는 사실 저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도 공유하는 바였다.

우리 시대는 지금 그런 방향에서 탈선해 모두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질주하고 있다. 나는 그 미래가 두렵다. 염려가 된다. 그 종착지가 어디일지 짐작이 잘 되지 않는다. 거기가 어떤 파라다이스가 아님은 분명해보인다. 해골이 나뒹구는 황무지 혹은 폐허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내일 일 걱정’은 예수의 이 발언에 배치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런 걱정은 아마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나는 역설적으로, 이런 염려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과 ‘그의 아들’인 예수를 믿고 의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이 소박한 언어들이 그런 이들을 위한 지지와 응원,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염려하지 마시라, 당신들이 있는 한, 이 욕망의 열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파멸에 이르기에는 신의 창조물인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그들의 세상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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