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까마귀가 울다 날아갔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까마귀가 울다 날아갔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3.18 14:56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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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까마귀가 울다 날아갔다

바람 속에서 나라 온 까마귀는
교회 종탑 피뢰침에 앉아
단물 빠진 낮달을 쪼아 먹고 있었다

사람의 기도는 모두 식상해져서
하나님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문장은
누구의 입술도 지어내지 못했다

일요일이 반 이상 지나가고 있지만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한 채
새로운 죄가 곳곳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그래도 희희덕거리며
길잃은 양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성전을 둘러싼 가시 울타리를 정비했다

이미 헌금통에는 젖과 꿀이 넘치고
천국보다 달콤한 나날이었으므로
애써 회개할 일을 찾아 괴로워하지 않았다

낮달을 먹고 더 배가 고파진 까마귀가
깨진 종을 대신해서
몇 번을 아프게 울다 날아갔다
(길상호, ‘검은 일요일’)

제목부터 음산한 느낌이 든다. 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일요일은 휴일이기도 하지만, 교회에 나가서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 온 잘못을 반성하는 즉, 교회의 용어로 회개(悔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날 역시 교회의 용어로 죄사함의 날이다. 그리고 까마귀의 이미지와 교회 종탑의 대조적인 배치 이것은 죄(罪)와 사(赦)함의 이미지 즉 죄인과 회계를 받아들이는 대칭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달은 어떤가 어두운 밤길을 인도해주는 존재인데 그달이 낮에 있다면 모두의 시선을 쉽게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적인 존재는 제 역할을 잃은 달(단물 빠진)을 쪼아 먹어봐야 하나님의 귀를 솔깃(구원)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까마귀의 의미는 외형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존재, 이른바 교회에서 말하는 죄인? 무거운 짐을 진 어린 양으로 볼 수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이야 말로로 참다운 크리스천 (Christian)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시를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달빛은 빛바래져 버린 교회의 ‘죄 사함’의 의미를 상징화하는 것이요, 더구나 이미 교회의 종은 깨져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맑은 소리를 낼 수 없으며 속인들의 생활 저변에서 흘러나오는 순한 소리만 들리고 있다는 의미의 “까마귀가 몇 번이나 아프게 울다 날아갔다”가 가슴 아프게 한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의 죄 사함의 논리는 예전과 비교해 본질에서 많이 퇴색되었다는 사실을 메타포(metaphor)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인이 슬프게 여기는 사실은, 회개를 할 수 있는 일요일이 거의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삶의 길을 잃고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는 가난하고 길 잃은 양들이 교회로 들어오고자 하지만 정작 이들은 못 들어오게 울타리를 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교회 본연의 일을 잊고 젖과 꿀이 넘치는 헌금(獻金)에만 눈독을 들이는 행위를 두고 실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차곡차곡 담겨있는 듯하지 않은가.

세상이 많이 혼탁해지고 있는 시대이다. 세속의 상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성세(聖世)에까지 세속적 탐욕을 노골적으로 전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을 얻어야 할까. 최근 대형 교회에서 부도덕한 방법으로 신도를 모으고 헌금을 강요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 코로나(covid-19) 사태의 시작점도 어쩌면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 말세적 풍속 앞에 진정으로 구도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발 이제는 젖과 꿀이 흐르는 헌금에만 눈독을 들이는 교회를 보고 실망하여 더 배가 고파진 까마귀처럼 아프게 울다 날아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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