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사천 출신 항일투사 이응규
진주성-사천 출신 항일투사 이응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3.25 11:4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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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사천 출신 항일투사 이응규

이응규(李應奎)선생은 경남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209번지 출신이고 합천 이씨의 후손이다.

이응규 선생은 이병년과 전주 최씨 최인천의 슬하에서 1907년 9월 8일 태어났다.

소년 시부터 똑똑하고 영리하여 천재라는 별명을 가졌다. 1924년 진주의 양정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1월 사회주의 계열의 일월회가 조직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입해 안광천(경남 진영) 하필원(하동 옥종)등을 만나 교류하고 함께 활동했다.

1925년 4월 칸다의 사립연수학관 영어과에 입학하여 1926년 3월 졸업했다. 재학중 동경 조선무산청년동맹회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선청년동맹에도 동참하게 된다.

연수학관 고등과에 재학 중 <대중신문>기자로 활약했다. 1926년 8월 귀국한 그는 진주 진명학원(한규상, 김연호, 김찬성 등이 설립)에서 토론할 때 토론 제목은 ‘문화향상에 투쟁이냐 협동이냐’이었고 토론자는 이응규, 강춘순, 천용근, 김찬성, 임영달, 한규상, 최돈 이었다.

사회주의 잡지 <이론투쟁>의 기자와 집필진이 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新幹會(신간회)가 조직되자 동경지부 출판부 간사가 되었고
1928년 2월 고려공청 일본 총국 기관지 <현계단>의 편집위원이 되었을 때 대대적 검거 작전이 전개되자 1929년 7월 귀국했다.

1930년 8월 이종림, 김상혁 등과 조직재건운동을 전개하고 1931년 7월 대구에서 개최된 조공주의자 협의회에 전남대표로 참석했다. 이어 12월에는 전남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고 17개 단체를 모아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전남노농협의회를 조직했다.

기관지<코뮤니스트>와 <봉화>를 인쇄해 배포했다. 1932년 3월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대구지법에서 징역 4년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직재건운동을 전개하다 또 피체되어 1943년 석방되었으니 약 10년간 옥고를 치른 셈이다.

광복 후 서울에서 <해방일보>주필이 되고 1946년 2월 박헌영을 비판하고 사회노동당 선전부장 중앙위원이 되어 활약했다.

1956년 12월 진주시 상봉동에서 사망했다. 이응규 선생은 진주정씨 정재철의 딸 정정순과 혼인해 1남2녀를 두었고 손자들은 대전, 경기도 일원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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