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하늘에 쌓아 두라”
아침을 열며-“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하늘에 쌓아 두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3.29 14:1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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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하늘에 쌓아 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 6:19~21)

유명한 산상수훈(=산상설교)의 일부이다. 예수의 참으로 특이한 가치론이다. 이 말의 주제는 누가 보아도 ‘보물’(θησαυρός)이다.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쫑긋해지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에 읽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좀 설렐지 모른다. 뚜껑 열린 보물 상자에 가득 차 번쩍이는 금은보화들이 곧바로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바다 속에 가라앉은 몇 백 년 전의 이른바 ‘보물선’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이 ‘보물’이란 물론 우리 인간들이 소중히 여기는 ‘귀한 것들’, 온갖 ‘좋은 것들’의 상징이다. 대표적으로는 ‘재물’일 것이다. 물론 재물만은 아니다. 아마도 유사 이래 대부분의 인간들이 추구해 마지않았던, 공자도 지적한 바 있는 부귀(富與貴是人之所欲也) 내지 부귀영화, 혹은 소크라테스도 지적한 바 있는 ‘돈, 지위, 명성’, 즉 ‘부-귀-공-명’이 다 포함될 것이다. 이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소위 ‘인생’의 실질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의 이 말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혹은 유심히 들어보면, 우리는 이 보물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땅에 쌓아두는 보물’과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이 그것이다. 땅에 쌓아두는 보물이 아마도 부귀공명일 것이다. 창고 혹은 금고가 그것을 상징할 것이다. 오늘날은 어쩌면 ‘계좌’와 ‘등기부’가 그 대표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쌓인 ‘잔고’ 내지 주식 채권 지재권 회원권 그리고 부동산 예술품…기타 등등 형태는 아주 다양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쌓아두지 말라’고 그 가치를 부정한다. ‘말라’라고 하는 금지어가 마치 공이처럼 종을 울려 그 육중한 울림이 낮은 음향으로 귓가에 오래 남는다. 이런 가치관은 사실 신약성서 전반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니 실은 교회에 가서 이런 것들을 ‘주시옵소서’ 하고 ‘비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인 것이다. 교회가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말도 안 되는 모순인 것이다. 예수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에게 탁자와 의자를 뒤엎으며 분노한 이야기를 우리는 심각하게 곱씹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 21:12,13)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사실 엄청나게 불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세상적인 가치의 추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고 떠나라고 가르치는 저 부처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예수는 그 대안을 제시한다. 그게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이다.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게 대체 뭘까. 그것도 실은 신약성서 전편에서 이미 시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 4:4)하는 것이 그것을 알려준다. 그러한 삶 자체가 바로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그의 계명인 ‘사랑’이 대표적이다. 보물도 그런 보물이 없다. 허심, 긍휼, 화평, 용서, 청정심, 화해 …그런 것도 다 마찬가지다.

이런 가치들은 저 ‘부귀공명’과 별개의 차원에 존재한다. 그런 세계, 그런 삶이 따로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땅의 나라’와 ‘신의 나라’가 그 두 개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말씀대로 살면 그 삶 자체가 보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쌓인다고 예수는 일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른바 ‘선’(善)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의 선조들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남는 기쁨이 있고, 악은 쌓는 집에는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이라는 말도 예수의 이 말과 그 문맥이 닿아 있다.

땅에 쌓아두는 보물, 즉 부귀공명 같은 세상의 보물들은 영원하지 않다. 그것을 예수는 ‘좀-녹-도둑질’이라는 말로 알려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의 과정에서 이것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정상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본 사람들 잘 알 것이다.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부처가 말하는 고고-괴고-행고, 아픈 괴로움, 무너지는 괴로움, 변하는 괴로움, 그것도 실은 이 ‘좀-녹-도둑질’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쉽고 간단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삶의 어느 경우, 어느 시점에선가는 반드시 이 울림이 크게 우리의 가슴을 때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를 위해 예수의 이 말을 마음 한켠에 기억해두기로 하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그 마음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선택’(choix)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알려줬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땅에 있는가, 하늘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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