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파성 설창수 선생의 항일공적
진주성-파성 설창수 선생의 항일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08 16:1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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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파성 설창수 선생의 항일공적

설(薛)씨 시조는 경주 6촌장이며 신라 삼문장, 대문장 3인 이라함은 최치원, 강수, 설총을 가르친다.

전국 231개 향교에 가보면 공자, 맹자, 최치원, 안유 등과 함께 설총 선생이 향사되고 있다.

고려 고종 때 추밀원부사 설신과 그의 아들 설공검, 설인검이 유명하고 <고려사>에 입전되었다.

설창수(薛昌洙)선생은 원적이 창원시 북동리이며 본적은 진주시 본성동 497번지로 기록되었다.

설창수 선생은 개천예술제를 제창 시작하신 분으로 시인. 항일투사, 언론인, 예술가로 유명하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전신인 진주농업학교 재학중 TK단을 조직 활동한 사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동아일보 1931년 11월 15일자 조선일보 1931년 12월 3일자 등에 의하면 <반역>이란 잡지를 2호 까지 발행해 영남 일대에 배포하다 청년학생 수백 명이 검거되었고 결국 19명이 검찰청에 송치되었다.

그 당시 주모자들은 17세~21세 이었으나 설창수 선생은 15세로 형사처벌 대상자가 아니었으나 기소유예 처분되었다.

일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부친이 세운 칠암야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일본 입명관 대학에 입학했으나 다시 일본대학 예술창작과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이철영, 김보성 등 9명이 화요그룹을 조직해 시를 지었다.

일본 북구주 상포시에서 알바를 하면서 교포사회에 들어가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부산지청으로 압송되어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혼절하였다.

1942년 6월 2일 부산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이 언도되었고 미결기간이 6개월을 거쳐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44년 3월 4일 석방되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 대표(1957~1975),광복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진주시 문화상. 향토문화대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영남(개천)예술제 제 1회부터 대회장 제사장 등을 역임했다. 참의원(상원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나 혁명세력에 의해 임기를 채우기 못했다.

설창수 선생은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2-721호에 안장되었고 남강변에 흉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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