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사천 출신 항일투사 조우제
진주성-사천 출신 항일투사 조우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15 15:5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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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사천 출신 항일투사 조우제

조우제(趙佑濟)선생은 사천시 곤양면 출신이며 진주시 장대동 102번지로 옮겨 살았다. 사천 곤양보통학교 교사로 근무 중 제자 최범술 등과 <독립선언서>를 남해까지 전달하였다.

조우제 선생은 진주청년회. 노동공제회,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 동우사 임원으로 활동하다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대구로 압송되어 1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하동, 사천, 진주, 남해로 배포할 때 사천 축동 출신 강달영 선생등과 만났고 서로 감동을 주고 영향을 끼치는 관계가 되었다.

진주청년회관은 진주시 계동(옛 구세군 자리)에 있었지만 강대창 선생이 경영하는 시장내 진양상회에서 노동회의와 강연회를 개최했다.

김종범 선생과 함께 ‘시대적 각성과 소작운동’이란 제목으로 강연할 때 200여명이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노동공제회 전국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될 때 장영정, 박태홍, 조우제, 오덕근, 송혜숙 등이 참여했다.

1922년 8월 20일 천주교 청년회 2대 회장으로 당선되었는데 그의 아들 조승래(해방 후 사천군수)가 체육부장이 되었다.

1922년 9월 11일 소작노동자대회가 진주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때 1000여명이 운집해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신분제 혁파에 동참하여 1924년 2월경 형평사 간부로 활동하면서 형평사 본사를 서울로 옮길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남선축구대회를 주관하고 신간회 진주지회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하다 1925년 9월 대구 소재 조선은행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진주 김형갑, 조우제 선생도 대구로 압송되어 엄중한 조사를 받고 혼절했으며 약 1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진주농민조합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했으나 1933년 9월 전북 고등계 형사들에게 피체되어 전북 교원노조사건에 관련되었다면서 혹독한 고문으로 혼절하였다.

전주감옥에서 약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6년 8월 5일 진주 장대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1997년 8월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필자가 도우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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