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침을 열며-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19 14:2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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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 7~11, 누가 11: 9~10)

얼마 전 어여쁜 가수 구하라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그 안타까움 속에서 이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 말을 몰랐을까? 마음의 평화와 진정한 행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했더라면 어땠을까…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의 이 말은 이 지상에서 인간적인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준다. 긍정적인 메시지인 셈이다. ‘얻을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기 말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격려인 것이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말이다. 너무나도 고마우신 말씀이다. 요즘은 이렇게 온기가 느껴지는 토닥임 자체도 흔하지가 않다.

일종의 직업병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말을 철학적으로 분석해서 읽어본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은, 내 식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대원리인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는 말이다. 졸저 <인생의 구조>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우리 인간은 애당초 욕망이라는 것을 대원리처럼 지니고 태어나 인생을 살아간다. 뭔가를 갖고 싶고, 뭔가를 하고 싶고, 뭔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 온갖 ‘싶음’ 속에 우리 인간의 정체가 있다. 엄마의 찌찌, 맘마, 까까에서 이른바 부귀공명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무한히 다양한 형태로,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생겼다가 변했다가 없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전개된다. 그것을 이루려고 애쓰는 과정이 인생인 것이다. 그게 이루어지면 행복이고 그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불행이다. 그 과정의 희로애락, 그 희비쌍곡선이 다름 아닌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은 그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인정은 하되 ‘뭐든지’는 아니다. 예수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명쾌한 구별이 있다. 떡과 생선이 좋은 것을 상징하고 돌과 뱀이 나쁜 것을 상징한다. 나쁜 것을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면…, 돌과 뱀을 원한다면, 아마도 거기엔 신의 응답이 없을 것이다. 주어지지 않을 거고 찾지 못할 거고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저 ‘기도’의 대원칙이기도 하다. 나쁜 놈을 제발 죽여 달라고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 2000수백 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글귀 중, “만일 신이 인간의 모든 기도를 들어준다면 그 순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사라질 것이다”라는 게 있다. 웃을 수 없는 진실을 말해주는 글귀다. 다행히도 신은 그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는 멸망하지 않고 지금도 이렇게 존속되고 있다. ‘신은 악인에게도 골고루 햇빛을 비춰준다’는 성경의 글귀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마태 5:45)

그렇듯 우리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은 ‘좋은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게 예수의 대전제다. 그런 거라면 반드시 하늘의 응답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처럼 하늘도 자식인 인간에게 아낌없이 줄 거라는 말이다. 생명과 세상(=자연)을 준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의식주도 준다고 예수는 지적한다. (공중의 새들, 들에 핀 백합화…를 그는 언급하며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지혜도 필요하고 또 교육도 필요하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런 지혜도 교육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좋고 나쁨 자체가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잘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구하고 찾고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는가? 혹 돌과 뱀을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안 준다고 하늘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예수의 말에, 그런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자. 주어질 것이다. 찾아질 것이다. 열릴 것이다.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보장했다. 믿고 맡기며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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