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마천 위에서
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마천 위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22 15:5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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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아마천 위에서

흰 바닥을 누르며
낮은 나무가 되어
문득 자란 고드름이 되어
잠이 설었다가 미간을 스치는 얕은 발자국

갓 뽑은 직물인 양 솔기를 어르면
놀라 돌출하던 뿌리의 기억

남겨둔 살이 가엾다 다시 바람 거세어
녹다가 굳은 고백은 순한 칼날을 내어놓고

드물지 않은가 잔 손길에 살갗을 떨던
점액질의 문을 열어 몸을 누일 때

짓고 짓는다. 같은 모양의 회오리를 얻어
작년 쓰던 아마천 위에서
방금 돋은 자웅(雌雄)을 부비는 꿈을

(이혜미, ‘꽃뿔’)

시인은 이 시를 어떤 의도에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에로틱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는 것 같다. 제목부터 특이하다. 꽃뿔이라, 일반적으로 꽃은 생식 작용의 일종으로 여인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달거리를 하면서 흘리는 피, 그러니까, 여성의 월사(月事)에 해당한다. 그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니까 꽃이 핀다는 것은 종족 보존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꽃뿔은 꽃잎이나 꽃받침이 달린 곳에 있는 돌기 부분으로 그 속에는 꿀샘이 있는 부분인데, 꽃의 가장 핵심 부분으로 일종에 꽃이 가지고 있는 음핵 부위 셈이다.

첫 연에서는 고드름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뿌리를 가진 것들은 지상에서 하늘 방향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일하게 천장에서 땅으로 자라는 것도 있다. 석순이나 고드름이다. 남성의 생식기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옷을 만들 때 옷감과 옷감을 재봉실로 연결한 부분을 솔기라고 한다. 솔기 부분을 다름질하면 누워있는 것이 정상이지만 야물 치게 하지 않으면 돌출하기 마련이다. 그 솔기가 돌출하듯 고드름이 돌출된 상태는 칼날이 없는 순한 상태의 남성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점액질의 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여성의 힘으로 고드름과는 자웅이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액질의 문을 연다는 것은 생식행위의 시작을 알리는 상태가 되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아마천은 아마의 줄기 껍질로 짠 부드러운 천이다. 그 아마천 위에서 자웅(雌雄) 즉 암컷과 수컷이 비빈다는 것은 당연히 사랑의 행위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여기저기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봄이 오고 있다. 꽃뿔에서는 곳곳에서 쉼 없이 생명이 탄생하는 현장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비교적 젊은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탄생 순간을 섬세하게 고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잘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시는 여류시인이 아니면 좀처럼 잘 표현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리면 속뜻을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깊은 메타포(metaphor)가 동원된 점은 이 시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그리고 생식행위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속된 어휘나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이 시의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표현에서 볼 때 시인의 어휘 하나하나를 선택함에도 세심하게 노력을 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시 ‘꽃뿔’은 전반적으로 시적 품격은 물론 시어의 구사 측면에서도 앞서 언급했듯이 시의 품격을 높여주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인의 작품은 앞으로도 자주 읽어 볼 수 있다면 시를 쓰는 처지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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