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나의 어머니 개평댁을 기리며
시론-나의 어머니 개평댁을 기리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26 15:5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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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동/경남도립거창대학교 총장
박유동/경남도립거창대학교 총장-나의 어머니 개평댁을 기리며

어머니의 택호는 개평댁이다. 개평마을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에 그냥 이름대신 개평댁으로 사람들은 불렀다. 자연스럽게 우리 아버지는 개평양반으로 불려 졌고 우리 형제들은 개평댁 또는 개평양반의 아들이 되었다. 윤**라는 버젓한 이름을 두고 왜 그렇게들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는 모두 택호를 불러서 그게 그냥 자연스러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어머니 개평댁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개평마을은 서부 경남 함양의 작은 동네로 조선의 대학자였던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과 한옥마을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지만 상대적으로 개화가 빨리 된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산골오지로 시집을 왔으니 문화적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 왔을 때 앞집의 아주머니는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고, 마을의 훈장이셨던 시아버지는 아침에 당신의 오줌을 받아서 양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고 한다. 결국은 한 달도 못살고 친정으로 돌아갔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다시 어머니 손을 잡아서 돌려세우는 바람에 정착하게 되었고 다섯 아들의 ‘노예’가 되어 잠깐 대구에서 살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보수적인 집안이라 다 큰 처녀가 밤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하여 야학마저 못 다니고 마을의 언니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가’자에 ‘ㄱ’하면 각, ‘가’자에 ‘ㄴ’하면 ‘간’ 이런 식으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법 없이 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착하다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속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한테 모질게 못하니까 항상 손해를 보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과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약했지만 자존심도 있고 강단도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마저 아버지처럼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오형제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온전한 희생덕분이다. 당신이 그렇게 답답하게 느꼈던 산골오지 마을은 세상에 눈을 뜨고 보니 내 자신에게도 감옥 같이 느껴졌고 벗어나는 길만이 살 길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산골오지를 벗어나 2년 6개월을 서울로 부산으로 돌아다녔다.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집을 나가서 갖은 고생을 하다 뒤늦게 방황을 접고 돌아온 탕아에게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신 분도 어머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은 그렇게 희생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자식들 앞에서 아버지 흉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반항심으로 아버지한테 말대꾸를 하고 대들었을 때도 “나한테는 함부로 해도 이해를 하겠는데 너희 아버지한테는 잘해라. 평생 너희들 때문에 고생만 하신다. 너희 아버지한테 잘못하면 너희들 죄 받는다”고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러면서 정작 당신은 아버지 생신날에 돌아가셔서 생신마저 빼앗아 가신 심보는 또 뭔가? 혹시라도 머리 큰 아들들이 아버지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세뇌를 시키신 것인가? 아무튼 어머니의 그런 오랜 세뇌교육 때문에 열심히 사셨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는 크게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나름 대우를 받으면서 사셨다.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는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세상을 떠나셨다. 주말을 맞아 시골집에 온 아들의 부름에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개울을 급하게 건너오다가 넘어지셔서 대퇴부 골절상을 당했고 수술을 받았지만 일주일 만에 운명하셨다.

불효자식은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어머니 병상을 일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수술 후 일반병실로 옮기는 것만 보고 급하게 상경했는데 그리 허망하게 가실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자식들 뒷바라지 하다 보니 몸 안에 모든 진액은 빠져나가고 뼈도 바람 든 무가 되어 조그만 충격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고 수술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결국 전신마취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의 진액을 우리가 다 빨아먹어 어머니는 수수깡처럼 말라서 돌아가셨다. 마지막까지 자식들 걱정하면서…가끔씩 아주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지금도 개평댁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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