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각자의 시간들
시와 함께하는 세상-각자의 시간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5.06 16:0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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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각자의 시간들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 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의 초점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하재연, ‘동시에’)

시간을 회화(繪畵)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는 순간에도 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77억 지구인들이 이 시간에 77억 개의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현상적으로 어떤 일을 만들어 가고 있다면 짧은 일 초 동안의 일들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객관적인 어떤 여인이 여유를 즐기면서 독서를 하는 동안, 객관적인 어떤 남자 물론 이 둘은 서로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관계이다. 그 남자는 자살을 기도하며 자동차로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순간, 이 둘의 관계는 전혀 상관없는 사이이면서 극과 극의 선택을 하고 있다. 시계가 열두 번을 돌아가는 그 순간, 그 12분 사이에 100m 달리기를 하던 어떤 소년은 결승점에 도달하여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고, 그 환호 소리로 인해 양탄자를 들썩거리게 하여 커피잔을 쏟았지만, 달리기하듯이 재빠르게 대처하여 양탄자를 젖지 않았다는 그 순간, 소녀가 행운을 비는 동안 이미 양손은 쪼글쪼글해 버렸고 머리카락은 가늘어 젊은 시절의 그 빳빳한 힘을 잃어버리고 가늘어진 머리카락만 남은 중년이 되도록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세월만 쏜살같이 흘러 가버린 것을 비관하여 높은 지붕에서 비행(자살)하려는 누군가의 그 순간, 그렇게 각자의 그 순간들은 직접 어떤 한 사람이 관찰할 수는 없지만, 이 순간 지구촌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가설이다.

‘~고’라는 연결형 어미의 반복은 어떤 사건이 동시다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사건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이질적인 것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즉 필자가 여기 서재에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는 동안 서울 어느 곳에서 어떤 연인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둘의 상관성은 전혀 없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쇄적인 사건은 분명 구조적으로 서로 연관성을 가지게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사건들 서로 간에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각자의 삶의 과정에서 소비되고 있는 시간은 분명 빠르게 흐르고 그러면서 곳곳의 각 구성원은 자신의 당면 과업에 충실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등의 표현은 시간이 쉼 없이 흐르고 그 시간에 따라 각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동안 젊은 시절은 사라지고 늙은 시간이 일어났고 그 많은 시간이 반구조적(反構造的) 사건들이 각자 만들어가는 동안 삶의 종점에서 선 누군가의 시간대와 일치 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지금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갈망하던 내일이다”라고한 카네기(Carnegie, Andrew)의 말이 생각난다. 그냥 장난스러운 말 같지만, 이 시어 속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익명적(匿名的)이고 서로의 연관성도 없는 그리하여 서로 누구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당연히 만날 수도 없는 것이며, 장면과 장면들은 단지 병렬적으로 편집된 것이다. 단지 각자의 여러 곳에서 파편화되어있는 동 시간대의 사건들을 시인이 통어(通語) 즉 객관적인 입장에서 언어로 편집하여 표현만 했을 뿐이다. 서두에서 “시간을 회화(繪畵)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라고 했는데, 시인은 이러한 파편화 된 시간을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그려줌으로써, 빠르게 흐르고 있는 시간을 회화화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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