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이젠 사라진 생활문
진주성-이젠 사라진 생활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5.07 16:2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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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이젠 사라진 생활문

나를 키운 것은 할머니, 어릴적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억은 새겨진다. 입에 어릿대고 삼삼하고 귀에 자욱하다. 잠든 추억을 깨우는데 아득하고 헛헛하다. 고샅이 없고 아궁이가 없고 화로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 남은 기억마저 문드러질 것이다. 고샅은 농촌마을안의 좁다란 골목길이다. 잘달막한 담들을 끼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이웃해 있는 골목 창자 같은 길을 고샅이라 부르며 정들여왔다. 토담 너머로 음식 사발이 오갔고 꼬맹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이젠 없다. 들고 날 때 구멍 드나들 듯 등을 굽히는 구멍가게 사립문 우물물을 길어올리는 두레박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처럼 주막도 사라졌다.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 방바닥 아래 불길은 고래 뜨끈한 아랫목 지금은 아파트에 살면서 다 잃어버렸다. 막걸리를 거르고 남은 찌꺼기를 재강이라 부르며 설탕을 넣어 먹으면 달달하고 얼큰했다. 식사 뒤에는 숭늉을 마셨다. 눌은밥이라고도 하는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이다. 구수했다. 이제 전기밥솥에는 누룽지가 눌어붙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이의 앞니를 빼 지붕에 던지며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라고 소원을 빌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 향수다. 고향에 부치는 그리움이 어려있는 노래다. 화로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고 떡이나 밤을 구워먹고 나누던 이야기 노변정담(爐邊情談)도 그립다. 마을에 다듬이 소리가 들리고 물레방아가 돌고 콩 볶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품어주는 초가 지붕아래는 송아지가 뛰어놀고 강아지는 잠들어 있으며 닭은 모이를 쪼고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다.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광주리에 곁두리를 이고 나왔다. 쌀밥과 고소한 나물무침 무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갈치탕 등 논두렁에 아무렇게나 펴놓고 먹었지만 그때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운동회날 학교 스피커를 통해 초록빛 바닷물에…동요가 흘러나오고 운동장 하늘엔 만국기가 펄럭였고 100m 달리기 출발할 때 권총에서 나는 화약 냄새 결승전을 통과하면 1등은 증산(增産), 2등은 수출(輸出), 3등은 건설(建設)의 팻말 뒤에 자랑스럽게 섰다. 운동회의 마지막에 400m 청백전이 하이라이트. 학생과 학부모가 신나는 응원전 이렇게 운동회는 끝이 났다. 오랫동안 우리를 따뜻하게 했던 기억의 현장을 잃어버리는 것은 허전한 일. 너무 많은 소중한 것을 너무 쉽게 우리 곁에서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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