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아침을 열며-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5.17 15:05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Πάντα οὖν ὅσα ἐὰν θέλητε ἵνα ποιῶσιν ὑμῖν οἱ ἄνθρωποι, οὕτως καὶ ὑμεῖς ποιεῖτε αὐτοῖς: οὗτος γάρ ἐστιν ὁ νόμος καὶ οἱ προφῆται.)(마태 7:12)(누가 6:31)

이른바 산상수훈의 한 토막이다. 이 산상수훈은 신약성서를 통틀어 예수의 발언 중 가장 긴 것이다. (이것을 기록해준 마태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이것을 가치의 보고로 간주하고 우러러본다. 신앙여부와 무관하게 인류역사상 최고의 명강의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에 이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특별히 반갑게 생각하고 있다. 너무너무 중요한, 그리고 너무너무 좋은, 보석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모든 대인행위의 황금률로 간주한다. 남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예수는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기준’의 제시로 보아도 좋다. 내가 상대방을 대할 때, ‘내가 바라는 바’ 대로 대하라는 말이다.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걸 기준으로 남을 대하라는 말이다.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간단하다. 사람들이 남을 대하는 걸 보면 너무나 함부로 아무렇게나 막 대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당하면 싫은 일을 남들에게는 예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는 엄하고 나에게는 후하고, 그게 보통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걸 재미있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로남불’이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현실을 비꼰 하나의 상징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나는 예수의 이 말을 보편적으로 적용해 생각해본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모든 대인행위에서 이런 자세 이런 태도 이런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사적인 관계에서도 당연히. 그리고 공적인 관계에서도 당연히.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형제자매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상사부하관계, 남녀관계, 세대관계, 주인고객관계, 공무원과 국민관계, 통치자와 국민관계, 국가관계…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모든 관계에서 현실은 대개 ‘자기위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만주의’ ‘네탓주의’가 횡행한다. 인간들의 거의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을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는 자기위주. 바로 여기서, 폭언도 폭행도 왕따도 악플도 발생하고, 바로 여기서 도둑질에서 살인에 이르는 모든 범죄와 압제와 침략도 발생한다. 진실은 언제나 아주 단순한 곳에 있다. 자기에 대한 과대평가와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가 그 전제로 깔려 있다. 바로 그 음습한 곳에서 악의 곰팡이가 스멀스멀 자라나는 것이다.

물론 예수의 이 말이 그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이 비슷한 말이 있고, 공자의 어록인 <논어>에도 이 비슷한 말이 보인다.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라고 공자는 말했다. 표현이 뒤집혀 있을 뿐, 그 취지는 같은 말이다. 진정으로 훌륭한 분들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예수와 공자의 이 말이 훌륭한 것은 그 밑바탕에 인간의 ‘평등’이라는 것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하나면 너도 하나, 내가 열이면 너도 열임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보면 이 ‘평등’이라는 것은 거의 실현된 적이 없는 숭고한 이념에 해당한다. 21세기 현재도 그렇다. 차등과 차별은 비단 인도의 카스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다름과 차등은 가장 견고한 벽 중의 하나로 우리 인간의 행위를 재단한다. 예수의 이 말은 그걸 부수라는 말이기도 하다. 상대가 누구이건 ‘나’의 기분과 똑같이 되도록 대하라는 말이다. 이러니 숭고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밑바탕에 ‘좋은 것의 공유’라는 것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내가 바라는, 내가 기대하는, 내가 좋다고 여기는 그 어떤 것이다. ‘그런 것을 남에게 대접하라’ 라는 말이니 이게 ‘좋은 것의 공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꼭 물건이나 재물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그 기분 내지 상태가 좋아지는 모든 것이다. 특히 말과 태도가 그 핵심에 있다. 그걸 상대에게 주라는 말이다. 이건 상대에 대한 존중과 호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러니 예수는 보통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의 모든 발언들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어떤 간절함이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 7:28~29) 라고 한, 당시 이 말을 직접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그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말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는다. 그 자신이 애써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강조했지만, 나는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이 호칭에 충분히 합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판과 시비보다는 인정과 칭찬이 더 좋다. 나는 남들이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남들에게도 그렇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이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나는 비록 백발이 머리를 뒤덮은 60대이지만 기꺼이 30대 청년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 (그가 받아줄 지는 별문제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이런 가치론에 줄을 섰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