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농어촌 전화사업과 유선방송
진주성-농어촌 전화사업과 유선방송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5.21 14: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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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농어촌 전화사업과 유선방송

1964년 4월 1일을 기하여 1948년 북한의 단전이래 계속되었던 제한송전 조치가 전면 해제되었다. 이로 인하여 1965년 12월 30일 농어촌 전화사업 촉진법이 제정 공포되고 박대통령의 최대 관심 사업으로 시행된 국가적 정책 사업이었다.

농어촌 전화 사업은 낙후된 농어촌 근대화와 소득증대로 도시와 농촌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려는 정부의 지원 아래 실시된 사업이다. 농어촌 전화 사업으로 5개년계획(1967-1971)에 의해 전 마을에 공급되었고 전화 사업으로 변화된 농촌의 문화는 실로 엄청났다.

야간에 일할 수 있게 해주었고 TV이용 전등 덕택으로 학생들의 편리한 공부, 전기다리미 전기밥솥은 주부의 노력을 덜어주었다. 매달 계량기 검침원이 올 때마다 “전기 아껴쓰라”는 어른들의 말씀 방과 방 사이의 벽을 뚫어 하나의 전등으로 양방에서 쓰도록 하는 절약의 지혜도 발취했던 시절이었다. 농어촌 전기의 주 사용목적은 조명(照明)이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220V용 전구를 긴급 제작하여 공급할 수 있게 하였으며 다른 전기제품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220V를 110V로 내리는 ‘트랜스’를 무상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유선방송(有線放送)은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라디오는 큰 부잣집에서나 한 대 가질 수 있는 귀중품이었다. 한 동네 한 대 있으면 다행이고 한 대도 없는 마을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외부소식을 들을 수 없어 나라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일어나도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마저 불편하여 외부출입도 쉽지 않아 장날이 되어야 겨우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이처럼 바깥소식에 목말랐던 시골에 틈새를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선 것이 라디오 대용(代用)인 유선방송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을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유선방송은 전기가 들어온 마을에 라디오 중계시설을 갖추고 인근 마을까지 전선을 연결하여 집집마다 스피커를 달아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는 것이다.

스피커래야 합판으로 만든 사각통안에 나팔모양으로 생긴 말 그대로 스피커만 붙은 단순한 물건이었고 가입자들이 채널을 선택 할 수도 없어 중계소에서 보내주는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유선 중계방송사 직원의 마음대로였다. 유선방송은 농사를 짓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먼 곳에서 이곳으로 전화로 연락하였고 뉴스와 12시 노래자랑, 일기예보, 고춘자 장소팔의 만담 일일연속극에 울고 웃으며 귀를 기울였던 유선방송도 1970년도부터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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