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군청의 변신
진주성-진주군청의 변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5.27 15:5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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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군청의 변신

진주군청은 일제 때 수탈 기관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군청이라고 하면 1995년 1월 시군 통합으로 없어진 진양군청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으나 진주군청은 진주시청과 진양군의 모태이며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군청은 수 백 년간 진주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며 고종 32년(1895년)에 진주군으로 재편될 때 진주관아로 1939년까지 존속한 관청이었다.

진주군청이 설치되기 전 까지 진주목사의 집무실인 보장헌이 있었고 흔히 말하는 東軒(동헌)이었다.

경남도 관찰사인 집무실은 진주성안 영남포정사 문루 안쪽 선화당에 있었으나 진주군수의 집무실은 성 밖에 있었다.

진주군청이 주재한 곳은 풍수지리학상으로 부구몰이(釜龜沒泥)터라고 호칭되었는데 1970년에 진주전신전화국이 있었고 현재 하얀건물에 하얀메디칼 종합병원이 들어서 성업중인 곳이다. 부구몰리는 우거진 숲속에 황금빛 자라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고 귀한 터로 큰 부호와 인물이 난다고 전해 온다. 그 뒤 자라 늪은 사라지고 1895년 5월 진주군으로 재편되면서 목사대신 군수가 부임하게 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진주관찰부가 경남도관찰부로 변경되고 경남의 2부 29개군을 소관하게 되자 진주군은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

경남 29개 군수중에 1등급 대우는 동래군과 진주군이었으나 당시 진주군수 지위는 참서관이었고 군수 오현익은 노응규 의병대장이 생포해 처단하고 말았다.

<독립신문>1898년 7월 23일자에 보면 ‘진주군수 심상필씨가 아전이나 기생의 청이면 단술마시듯 하여 민간에 대단히 실망이 되었다더라’라고 보도되었다.

은결이란 이름으로 각종 세금을 착복하여 군수 3년이면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큰 길 건너편에는 기생조합이 있어 수청궁이 많았다.

진주군이 발족한 이래 22명의 군수가 재임했으나 조선인 군수는 박모, 한모, 김모 등 3명 뿐 이었다.

1939년 10월 진주읍이 진주부로 승격하자 진양군이 분리되었고 1948년 이후 3번 정도 좌익들과 전쟁으로 불타고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처음에 진주군 주내면 대안리에서 비봉동으로 변경되고 계동, 봉안동, 중안동으로 행정동이 수차례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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