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1) 두 가지 극단과 중도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1) 두 가지 극단과 중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5.31 15: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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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1) 두 가지 극단과 중도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그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한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한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부처가 득도 후 처음 설한 <초전법륜경>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이걸 좀 음미해보기로 하자. ‘중도’에 관한 이야기다.

나의 40여년 철학공부를 뒤돌아보면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를 가치로 삼는 철학이 있고 나 자신 알게 모르게 그것을 수긍해왔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가급적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것이 체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운데’의 가치에 대한 납득, 인정, 동조...그런 게 있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Majjhimāpaṭipadā),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中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간(mesotes: 알맞음)이 대표적이다. (단 이런 가치는 단순한 학문적 추상이 아니라, 지나침과 모자람, 혹은 치우침이 갖는 문제 내지 폐해에서 생각해야 비로소 그 실질을 얻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중간’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좀 이해하기가 쉽다. 유교의 중용도 과도와 불급이 아닌 ‘보통’의 가치를 말하니 기본적으로는 엇비슷할 수 있다. 다만 ‘무엇’이 지나치고 모자란가 하는 그 실질적 내용은 좀 유동적이다. 구체적인 문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불교의 중도는 막연히 뭔가 좀 복잡하고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인상 내지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의외로 아주 단순명쾌하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되듯, 그것은 두 극단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섬기지 않는 것, 의지하지 않는 것, 떠나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쪽도 아니고 극단적인 저쪽도 아닌 것이다. 부처는 친절하게도 그 극단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말해준다.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과 ‘자기 학대’(=고행), 이 두 가지다. 그리고 왜 이것을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이유까지도 분명히 말해준다. 이 두 가지가 다 ‘저열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딴 짓 해봤자 고통스럽기만 하고 아무 쓸데없다는(즉, 고에서 벗어나는 득도 해탈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 모든 경우에 다 해당하는 일반적인 혹은 추상적인 가치도 아니다. 그 적용범위랄까 경우가 또한 분명하다. 비구(즉 수행자) 내지 출가자에게 요구되는 가치요 수행지침인 것이다.

이미 유명한 바이지만 이건 부처 본인의 삶과 수행경험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귀납적 진리같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당시 인도의 전통적 방식에 따라 설산에 들어가 다른 종파가 하듯 온갖 고행을 다 해봤고 그러다가 기진해 쓰러졌고 수자타의 우유죽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렸고 그리고 나서 보리수 아래 가부좌를 틀고 매진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웬만큼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고행으로 피골이 상접한 부처의 모습과 수자타의 공양을 받는 모습도 그림 등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가 감각적 욕망 내지 쾌락을 탐닉했는가 어떤가는 좀 불명이지만, 그가 실제로 결혼을 했고 아내(야쇼다라)와의 사이에 아들(라훌라)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보면, 적어도 출가 전엔 이것과 아예 무관하지 않았다는 게 쉽게 확인된다. 또 왕자로서 춤과 노래로 가득한 주연에도 자리한 적이 있다. 그도 알건 다 알고 할 건 다 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 게 다 수행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방해가 된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 내지 쾌락에 관한 부처의 이 언급도 아주아주 너무너무 현실감이 있다.

나는 명쾌한 이 두 가지 사실을 철학적으로 사유해본다. 압축해서 감각적 쾌락과 자기학대다. 표현을 이렇게 하고 보면 그 범위 내지 문제영역은 수행자의 경우를 넘어 상당히 넓어진다. 이는 모든 인간의 삶 일반에 걸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은 이게 피해야 할 양 극단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두자. 극단은 언제나 문제를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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