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내 고향 발자취 찾았던 혜봉 김상조 선생 107주년에 부쳐
도민칼럼-내 고향 발자취 찾았던 혜봉 김상조 선생 107주년에 부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03 15:1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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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

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내 고향 발자취 찾았던 혜봉 김상조 선생 107주년에 부쳐


진주의 발자취 고서 문서를 변역하다 펜을 잡은 채 말문을 닫고 떠난 혜봉 김상조 선생은 오는 6월6일이 탄신 107주년을 맞는 날이다. 선생이 마지막 남긴 말씀은 “녹음 짙은 강산 계절의 형상 뚜렷하고, 남강에 봉황 날고 학 춤추는데 저녁 봄바람 일어나니, 가는 곳 오는 곳 없는데 머무는 곳 어디일까, 곡식을 탈곡하듯 몸만 바꾸어 고향으로 뒤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마디 남기고 고요히 떠난 해봉 김상조 선생께 삼가 명복을 빈다. 선생은 금정학원의 대선배로 살아 계실 때는 한학의 단문. 불경 해석이 불확실할 경우 찾아가서 즉석 질문에 즉석 대답의 자리를 펴고 차를 마시며 밀담을 나눔 하는 조용한 입술에 세어나는 다향처럼 언제나 자상하고 새로운 설명에 만족을 느낀다. 필자가 조제한 작설차를 선물하면 얼마나 감동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선하다.

선생은 통영 출신으로 진주 옥천사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동안 진주 농민봉기군에 시달려 동래 범어사 금정학원에 입학했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주모자로 연루된 금정학원장 김법린(초대 문교부장관)선생이 체포되고 학원이 해산되자 갈 곳이 없어, 다시 진주 옥천사 청담대종사 문하로 있다가 1940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면서 한국인으로 처음 <한국산신신앙숭배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귀국하여 고성 옥천사에 기거하면서 학당운영, 서부경남 일대 민속범패, 민속산신신앙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가 일제의 제압으로 그 맥이 단절된 이후 범패자료 일부와 천운경, 무속자료가 옥천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전할 뿐이다.

신교육 법에 따라 통영중·고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진주에 옥천사 말사 진주 연화사를 개원하고 전담 포교사로 재직하며 신교육 학교를 계획하는 과정에 해인사가 설립한 해인중고등 과정학교장(현 동명중·고등학교),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교수, 학장을 맞아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운영 부실로 동국대학교에 통합되어 교수, 서무처장, 도서관장 등 복직을 역임하였다가 임기 완료가 되자 진주로 귀향하여 가까운 불교단체, 대학 강사로 활동하였던 선생은 부산 경남일대에서 한학의 옥편이라 할 만큼 한학이 밝아 지방민의 옥편 역할을 했지만 글보다 보리 죽 한솔 더 먹는 것부터 우선 해결해야 될 그 시대에 청빈한 성격에 보릿고개의 삶은 너무나 고달팠다. 흔히 전하는 일화 가운데 신라 백걸 선생처럼 책을 더 소리 높이 읽었고 찬물을 마셔 굶주림을 인내하였다는 청백리 야담이 전한다.

삼현여자중고 교장의 교우로 도서관장직을 맞아 생계를 꾸렸으나 가족은 저마다 다른 길 걸어 멀어졌고 유품 목록조차 없는 진주 관계되는 고서들이 작은방을 채웠다고 전하지만 모두 유실되었다. 옥천가문 박연경 스님이 가야 사찰 법륜사를 복원하여 학덕을 피었다가 작고함으로서 학맥도 법맥도 멈춘 상태다, 연(蓮)자 후학들의 노력을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가 발견한 목판본 법화경(法華經, 1700년대 지리산 함양 조판소 제작)은 매우 희귀한 자료로 지방문화재로 등록했다.

선생은 평소 지식보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층 없는 대화와 삶, 자비로운 자세를 강조하며 누구나 공경하면서 존칭어와 말을 아꼈다. 전하는 실화의 한 토막 한학에 밝은 사람이 선생을 찾아가서 헛소리를 몇 시간 질문을 했지만 끝까지 존칭어를 사용하여 결국 잘못을 사과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선생은 한국의 보물이었다. 한학의 옥편이다. 경남 일대 고문서자료의 번역보다 진주지방 고문도서 자료 번역에 관심을 모으면 번역비의 요구보다 ‘알아서 주고 가라’는 그분의 소박한 생활 성품대로 일정한 규격과 등급 없이 하루 세끼 밥, 차 한잔마시는 것에 만족하였다고 전한다. 늘 하심(下心)하는 자세에 부족한 자신을 찾아주는 것을 언제나 최고의 만족으로 생각하며 진주 고문서 자료 변역한 목록을 정리하여 본 결과 진주시, 진주문화원, 진주강씨 문중, 대학가 간행본으로 진양지(전 육권합본), 진주목읍지(관선), 진주목정사(3권), 진주예찬, 진주누정기, 향제례, 향음주례 관례, 외 기문 비문, 향토사료, 진주시금속총람, 진주시사, 진양군사, 은혈공강선생유고사, 고산고희기념점, 진주인사 문집(6인문집)및 각문집의 기문, 기념문, 비문, 시문, 족보, 예시집, 향토 사료와 불(佛)서적을 진주 사람이 필히 읽어야 될 120여점을 변역한 것으로 추정되어 진주인의 숨은 국보였던 선생이 남긴 사상은 진주적이고 불교적이다.

자신은 본래 옥천사 이주문에서 태어났고 우리나라에서 불문을 강의하며 살라하였고 원효 종사를 받들어 모셨지만 아직 선양할 정도가 못되었지만 서방정토에 해지는데 살며 발을 옮기려 하였다는 명상록을 남겼다. 또한 선생이 평소 자신을 지키는 신조로 삶과 죽음이 가장 큰일을 강조했고 덧없는 세월이 빨리 간다. 짧은 시간도 아끼며 살자. 모든 일에 방심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주저, 저항, 근심 있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교훈처럼 당부한다. 사람의 공경을 생활화 하고 말다툼을 삼가하며 생각은 화목 되게 노력하며 각자의 주장과 견해를 함께 토론하며 유익한 일은 균등하게 베풂을 당부했다. 그러나 진주는 어느 지방보다 지방색이 강하여 유입된 사람에 배타적이다. 즉 끼리끼리 소집단체의 힘으로 자기를 과시한다. 한 예로 혁신도시에 유입인구가 정착 못하는 이유가 대표적이다. 진주를 빛낸 사람이면 누구든 가꾸고 훈장해야 한다. 평생 진주 고문서를 변역하여 진주를 소개하였던 해봉선생은 사실 진주의 국보이지만 진주는 그런 분의 업적을 땅속에 묻고 있다. 진주를 빛낸 사람을 찾아 금빛을 내야 문화예술 도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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