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행정과 외교의 달인 황희
진주성-행정과 외교의 달인 황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04 14: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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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행정과 외교의 달인 황희

황희(黃喜, 1363-1452) 명상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 개성출생 14세에 안복궁녹사 21세사마시 23세진사시 27세문과에 급제 47세지신사 내외의 요직을 거쳐 영의정 등 국정에 힘쓰다가 86세로 은퇴 청백리의 귀감이 되어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황희 정승은 두 여종의 싸움을 듣고서 “모두 옳다”고 했다거나 일 잘하는 소가 어느 쪽인지 농부가 묻자 소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의 귀에 대고 답했다는 ‘누렁소와 검은소’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구순을 사는 동안 56년간 관직을 하며 24년간 재상을 맡았고 그 가운데 18년은 영의정을 지냈다. 청백리 시절 집이 허름하여 장마 때면 식구들이 모여 앉아 우산을 쓰고 떨어지는 빗물을 피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실은 조선 다른 선비가 일화의 실제 주인공이다. 오성과 한음처럼 황희정승 역시 워낙 유명하다보니 당시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도 모두 그의 것으로 알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태종은 황희가 하루 이틀만 조정에 나오지 않으면 찾았고 세종은 대신들의 의견이 나뉘면 으레 “황희정승의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 역대 군주의 두터운 신임 때문에 그의 공직 생활도 별다른 굴곡없이 탄탄대로였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황희는 임금에게 바른말을 해야 하는 직책인 대간(臺諫)시절에 탄핵을 일삼다가 파직과 좌천을 연거푸 당했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했을 때 양녕대군을 옹호하다 귀양 갔다. 황희정승은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너그럽고 후했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정치적으로도 한층 노련하고 성숙해졌다고 말한다. 황희 정승은 태조로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공직에 재직했고 10여 차례나 사직을 청했지만 수리된 적은 없다. 그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영의정이었을 때도 회의석상에서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두루 듣고서 마지막에야 과거의 적절한 사례를 곁들여 종합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다보니 틀리는 법이 적었고 임금의 신뢰도 더불어 올라갔다는 것이다. 오늘날 말로 황희는 ‘행정의 달인’이자 ‘외교의 사전(事典)’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1431년(세종13)에 86세로서 은퇴하였다. 그는 평소에 관후인자(寬厚仁慈)하고 청백(淸白)한 관료생활을 한 것으로 이름이 나서 청백리(淸白吏)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황희는 조선시대 최장수 재상이지만 대중용 서적이나 몇몇 논문 정도를 제외하면 그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드물었다. 역사적 거물일수록 연구 성과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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