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반역의 시선으로 보는 조선사
칼럼-반역의 시선으로 보는 조선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08 16:0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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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반역의 시선으로 보는 조선사

반역! 그것은 곧 그 시대의 최고 권력에 맞서는 일이다. 성공하면 영웅,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반역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우리가 익히 알 듯 조선의 국조(國祖) 이성계는 고려의 역적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세 번이나 반역 행위를 하였다. 첫째는 자신을 믿고 군대를 내준 우왕과 당시 고려 육도 도순찰사로 고려 최후의 충신이었던 최영(崔瑩)을 배신하고 창을 거꾸로 돌려 섬기던 왕을 내쫓고 자신을 믿어준 상관을 죽인 일이고, 둘째는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세운 일이며, 셋째는 자신이 세운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일이다. 그 반역의 씨앗은 대를 이어 싹을 틔웠고, 그 싹이 자라 붉은 화살이 되어 이성계에게 되돌아왔다. 아들 이방원이 핏빛 칼날이 되어 춤을 추더니, 아비를 용상에서 밀어내고, 신하들을 도륙하고, 배다른 동생들을 죽이고, 동복형제끼리는 칼부림을 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아들에게 쫓겨난 늙은 아비는 용상을 되찾아 죽은 자식들의 원혼을 달래겠다며 또다시 역적이 되어 반역을 도모하니, 용상(龍床)은 그야말로 피의 퇴적물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지의 반역을 이겨낸 이방원은 의심과 불안에 치를 떨며 조강지처를 몰아세우다 못해 처남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으며, 사돈까지 반역의 죄를 씌워 죽였으니, 의심이 역적을 낳고 역적이 또 다른 반역을 낳는 형국이었다. 그 반역의 기질은 손자에게까지 이어져 수양이 아비와 형의 충신들을 죽이고, 자신의 아우들을 죽였으며, 조카이자 자신이 섬기던 왕(단종)마저 죽였다. 그러자 반역의 씨앗은 온 나라에 퍼져 신하가 신하를 역적으로 고변하여 출세의 도구로 삼고, 역적으로 내몰린 신하는 어쩔 수 없이 반역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었으며, 아예 반역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역사에 반역자로 남은 이징옥, 이시애, 남이, 허균, 이괄, 이인좌 같은 자들이 모두 그런 자들이었다.

반역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반역은 그 시대를 부정하고, 다른 시대를 꿈꾸는 일이며, 다른 권력을 생산하는 일인 까닭에 그렇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를 반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숨겨진 조선의 속살을 들춰내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는 늘 이긴 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때문에 반역자는 항상 악인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서술의 행간을 자세히 살피고, 그 행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내면 반역의 그늘 속에 숨겨진 그 시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이성계는 역적인가? 혁명가인가? 그는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을 일으킨 국조이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혁명가이지만 고려왕조 입장에선 나라를 훔친 역적이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스스로 옹립한 공양왕과 그의 세자를 죽였으며, 수많은 고려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훔친 조선의 국조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위화도회군’이라는 반역 사건이 도사리고 있다. 회군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었지만, 이 사건은 장수를 믿고 군대를 내준 왕을 배신한 반역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이성계의 반역행위는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진군하여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회군하여 자신을 믿고 군대를 내준 우왕을 내쫓은 것이 첫 번째 반역이고, 다시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家入津)’의 논리를 앞세워 창왕을 몰아낸 것이 두 번째 반역 행위였으며, 스스로 세운 공양왕을 쫓아내고 왕씨가 아닌 이씨로서 고려의 왕위를 차지한 것이 마지막 반역 행위였다. 이렇듯 이성계는 세 번의 반역을 통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 왕조의 국조가 되었다. 반역에 성공한 역적은 역적이 아니라 혁명가라고 한다고 했던가?

지난 6일은 현충일이었다. 국가보훈처가 현충일 행사 참석자명단에 코로나로 순직한 가족은 들어갔지만, 천안함 폭침, 제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 도발 전사 유가족과 생존자를 참석자에서 제외했다가 논란이 확산되자 “직원 실수였다”, 청와대 대변인은 “보훈단체에서 보훈처에 초청 인사로 추천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뒤늦게 포함했다고 하니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친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과 유가족들의 눈물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일부 생존자는 “능욕당한 기분”이라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니 포용의 정치가 아쉽기만 하다. 6·25동란을 경험한 필자이기에 씁쓸한 기분이 남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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