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2) 감각적 쾌락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2) 감각적 쾌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14 16:42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2) 감각적 쾌락

지난번에 불교의 중도와 그것이 피해야 할 양 극단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중 한쪽, 감각적 쾌락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이것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간단치 않다.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아마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간명하다.

이것에 대한 부처의 경계는 물론 이해가 된다. 불교적 수행자의 경우라면 특히 유념해야 할 기본이다. 수행의 장해가 되기 때문이다. 단, 머리를 깎았다고 감각까지 곧바로 함께 잘리는 건 아니니, 그건 생각의 가위 내지 의지의 가위로 잘라내야 할 것이다. 말이 그렇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일 게다. 그런데 대체 왜? 왜 이걸 경계해야 할까?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안이비설신)을 자극하는 감각(색성향미촉)의 유혹은 절대 만만치가 않다. 쾌락이 분내를 솔솔 풍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의식 내지 정신(意)을 자극하는 지식(法)의 유혹도 이 경계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아파테이아-아타락시아-아포니아를 얻기 위해 금욕(askesis, 수련)이나 최소한의 쾌락(hedone)을 가치로 삼은 그리스의 제논이나 에피쿠로스의 철학도 기본적으로는 부처의 그것과 유사했다. 특히 아포니아(aponia, 고통없음)라는 개념 내지 가치는 부처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고(苦)의 인식과 그 소멸의 추구라는 이 구조에 동서가 따로 없는 것이다. (아파테이아, 아타락시아도 실은 불교의 번뇌없음과 통하니 그 근본은 엇비슷한 셈이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평정을 위해 쾌락을 버리는 이 문제는 간단치 않다. 나는 한때 불교에 심취했고 많은 점에서 그 이론에 매료되었지만 100% 납득하지 못하고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자연의 원리에 반하는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고의 원인이 되는 일체 존재가, 특히 그 구체적 원인인 감각적 쾌락이, 애당초 왜 이 세계에 존재하느냐, 왜 그걸 버려야 하느냐, 하는 철학적 의문…그런 것이다. 불교는 원천적으로 그 자연스러움(혹은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거스르는) 아주 부자연스런 가치체계인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는 것은 나비가 꽃을 찾듯, 물이 아래로 흐르듯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또한, 감각을 아무리 부정해봤자 꽃은 여전히 예쁘고 새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고 장미와 라일락은 여전히 향기롭고 빵과 커피는 여전히 맛있고 비단과 여인의 살결은 여전히 보드랍지 않은가. 그건 다 ‘좋은’ 게 아닌가. 애당초 존재 자체가 그냥 그렇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걸 애써 부정하는 게 과연 정말 정답일까…누구나가 느낄 이런 일차적인 의문을 고명하신 대사님들은 어떻게 설명해내실까. 아니 그 이전에 부처님 본인은 어떻게 설명해내실까. “…산을 보니 산이요 물을 보니 물이었다…”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及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個休歇處,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靑原惟信禪師) 어쩌고 하는 것도 이것에 해당될 수 있는 일종의 설명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 경지에 대한 이야기이지 그게 객관적 존재사실에 대한 속 시원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감각적 쾌락의 추구는 그렇듯 일단은 당연한 존재의 질서요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일차적으로 ‘좋은’것이다. 좋으니까 본질적으로-자연스럽게 이끌리고 추구하는 것이다. 삶 그 자체의 최대원리인 욕망의 가장 구체적인 제1차적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것을 굳이 끊고 버리라니! 가까이하지 말라니! 부처는 왜 이런 반자연적 가치를 이야기했을까. 그것도 득도 후 처음 설한 경전의 첫 부분에서. 그 이유를 우리는 물어봐야 한다.

부처쯤 되는 분의 이야기니까 이런 건 단순한 우연이 절대 아니다. 게다가 맨 첫마디에 나온다는 건 이게 그 자신의 관심에서나 실제에서나 그만큼 강력하고 실질적인 그 무언가라는 방증이 된다. 포지티브한 점에서도 그렇고 네거티브한 점에서도 그렇다. 즉, 감각적 쾌락이라는 게 그만큼 강력하고 실질적으로 우리를 좌우하고(즉 그만큼 ‘좋은’것이고), 또 그만큼(즉 ‘좋은’ 만큼) 강력하고 실질적으로 고의 원인이 되고 그만큼 강력하고 실질적으로 수행의 장해가 된다는 말이다. 왜 감각적 쾌락을 멀리해야 하는가? 굳이 묻는다면, 이게 일단은 부처의 대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