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그립다(1)
칼럼-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그립다(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15 16:0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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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그립다(1)

공자(孔子)께서는 ‘나라에 정도(正道)가 서 있을 때 녹(祿)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나라에 정도가 서 있지 않을 때 녹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생물학적으로 분류하면 동물에 속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에게 수성(獸性)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수성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이른바 인간의 본성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양식 있는 사람은 지식인과 구별된다.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지식은 있는데 양식이라는 미덕을 수반하지 못하면 남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식은 행동을 수반해야 한다’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지만, 조선 시대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선비의 덕목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자면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아니하면 아무 쓸모없는 지식으로 치부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시절의 학문이나 철학은 성리학(性理學)으로 대변되고, 성리학의 근본은 아는 바를 행하는 것을 최선의 미덕으로 여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문자를 익히는 순간부터 성리학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람 마음속의 이른바 수성(獸性)이라는 동물적인 욕구를 다스리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사람의 본성에서 동물적인 욕구를 다스리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동서고금의 석학들이 한결같은 삶의 지표로 행동하는 미학으로 설정했겠는가. 그러한 가르침과 규범을 알고 있으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임을 감안한다면, 양식을 수반한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지 확연히 알게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역사를 읽으면서 한 인간의 인품에 감동하고, 삶의 가지런함에 존경을 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행동을 수반한 지식인,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흔치 않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아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인 선현들의 고사(故事)를 대하면 가슴 뿌듯한 감동에 젖게 된다.

세종 조에 유관(柳寬, 1346~1433)이라는 영의정이 있었다. 그는 수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삼간 모옥(茅屋)에서 살 만큼 청렴결백하였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방 안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책을 읽었다. 그의 아내인 정경부인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몸소 바느질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우산을 쓰고 책을 읽던 유관은 측은하기 한량없는 지어미 정경부인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부인, 오늘같이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찌 지낼꼬?” 이 기막힌 물음에 정경부인이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오늘날의 고위 공직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일화를 전해들은 어느 전직 검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고지식한 자가 일국의 수상의 자리에 있었으니 나라가 온전할 수가 없었지!”라고 했다고 한다. 참으로 놀랍고 오만방자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람이 검찰이라는 조직에 있었으니 권력기관들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공해 왔다.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한다. 이 때 당시 영의정은 윤방(尹昉, 1563~1640)이었다. 만주족 오랑캐의 주력 부대가 남진하고 있을 때 평안감사 윤선(輪扇)은 싸울 궁리도 하지 않은 채 도주하고 말았는데, 공교롭게도 윤선은 영의정인 윤방의 친동생이었다. 조정에서 싸우지 않고 도주한 평안감사의 직무유기를 논죄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윤선의 논죄에 앞장섰던 사람이 영의정이자 그의 친형인 윤방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 아우인 윤선의 효수(梟首)를 청하고 나섰다. 임금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은 윤방의 강청에 당혹감을 금하기 어려웠으나, 아우의 논죄를 주장하는 그의 강청은 조정의 기강을 세우자는 일이 아니겠는가. 조정은 날로 전세가 불리해지는 것을 기화로 윤선의 논죄를 뒤로 미루고 강화도로 몽진하게 되었지만, 윤방은 몽진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아우의 논죄를 주청했다. 공직에 있는 자가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특히 그는 선조와 사돈관계였기 때문에 어찌 보면 동생을 살릴 수도 있었겠지만, 형의 집요한 강청이 받아들여져서 윤선은 강화도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목이 잘리는 효수형으로 처단되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썩어빠진 전직 검사라는 자는 그때서야 얼굴을 붉혔다고 하니 인간이 잘못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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