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감각적 쾌락(2)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감각적 쾌락(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6.28 15: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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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3) 감각적 쾌락(2)

지난번에 이어 감각적 쾌락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나는 대부분의 인간들처럼 범속한 사람이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연민의 정을 혹은 존숭의 념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르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이른바 문화와 예술의 원동력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안이비설신’이 없다면, 특히 그 쾌감이 없다면, 문화와 예술은 원천적으로 성립 불가능일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허무한 인생에 대해 작지 않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안이비설신의, 그것에 대응하는 색성향미촉법, 그 기여가 그 얼마인가! 색: 온갖 자연의 풍광과 미남미녀와 온갖 그림과 조각과 건축과 사진과 드라마와 영화...등등 우리의 보는 눈과 연관된 모든 것들, 성: 새소리 벌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비롯한 온갖 자연의 소리와 그녀의 속삭임과 노래와 연주 ... 등등 우리의 듣는 귀와 연관된 모든 것들, 향: 온갖 꽃들의 향기와 그녀의 달콤한 숨결과 식욕을 자극하는 빵과 커피의 향기...등등 우리의 냄새맡는 코와 연관된 모든 것들, 미: 온갖 과일과 채소와 과자와 케익과 초콜릿과 요리의 맛...등등 우리의 먹는 입과 연관된 모든 것들, 촉, 실크와 비로도와 푸근한 면과 푹신한 이불과 그녀의 고운 살결...등등 우리의 만지는 손(느끼는 피부)과 연결된 모든 것들, 정말이지 감각의 쾌락은 한도 끝도 없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런 걸 좋아한다. 선호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부처에게 묻지만 이런 것들이 애당초 무슨 죄란 말인가! 그냥 각각 그 자체로 좋고 있을 따름이지 않은가! 봄날의 벚꽃이며 아지랑이, 여름날의 수박이며 아이스크림, 가을날의 단풍이며 낙엽, 겨울날의 온돌이며 군고구마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안이비설신이 그걸 좋아하는 게 무슨 죄란 말인가. 사랑스런 그녀를 안고 입맞추는 게 무슨 죄란 말인가. 좋은 것들의 원천적인 좋음! 그리고 그것들을 좋아함! 나는 그 모든 것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기꺼이 변호사로 나서줄 용의가 있다. 술이라도 한잔 목구멍을 넘어가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부처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 그가 괜히 이런 말을 했겠는가. 더군다나 8만에 이른다는 경전의 맨 첫 부분에서 첫 마디로 이 말부터 꺼낸 게 과연 우연이겠는가! 명백한 이유가 있다. 이게 결국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집착 내지 애착이 ‘고’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다. 그래서 이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고, 말아서 도달해야 할 하나의 특수한 ‘경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불교는(부처의 언어는) 비로소 설득력과 호소력과 위력을 갖기 시작한다. 불교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헛된 것에 대한 무지 및 집착과 그로 인한 괴로움....그 인식과 탈피의 노력, 부처의 언어들은 바로 이 언저리를 맴돈다. 색성향미촉법이, 안이비설신의가, 그게 왜 있는지, 왜 좋은지, 왜 그게 연결되어서 후자가 전자를 좋아하는지, 그런 존재론적인 의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런 건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괄호쳐진다(einklammern). 판단중지(epoche)의 대상인 것이다. 스위치가 내려져 있다. 불교적 관심은 오직 거기에 ‘괴로움’(dukka)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색성향미촉이 다 헛되다는 것이다.(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그게 출발점이다. 아주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다.

감각적 쾌락의 헛됨...그건 사실이다. 주지육림과 가무와 여색만이 아니다. 봄날의 화려한 벚꽃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도 이내 바람에 흩어진다. 여름날의 짙은 녹음도 잠깐이다. 가을날의 단풍도 순간이다. 겨울날의 함박눈도 이내 녹아서 질척거린다. 세상 그 어떤 미녀의 미모도 세월은 가차없이 거둬가 버린다. 그 무상함을 부처는 꿰뚫어본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에 애착을 갖고 집착하는 만큼 그 상실의 고통도 커질 수밖에. 부처 식으로 생각하자면 일체의 감각적 쾌락, 그 모든 ‘좋은 것’이 다 헛된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 나오지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읊조린 저 솔로몬의 말에서도 어딘가 불교의 향내가 난다. 좋은 것 중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소위 부귀영화도 실제로 누려본 그다. 그런 그가 그게 다 헛되다는데, 색성향미촉이야 어디 견줄 수나 있겠는가. 조금만 긴 눈으로 봐도 그건 다 헛된 것이 맞다. 그 헛됨에 대한 증언들은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차고 넘친다. ‘화무십일홍’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최영미) ‘이슬로 나서 이슬로 사라지는 이 내 몸이여’(히데요시) ‘모든 것은 흐른다’(헤라클레이토스) 기타 등등, 정말 한도 끝도 없다. 전직 대통령들, 재벌회장님들, 각계의 유공자들, 유명인들이 누구보다도 그 이른바 부귀공명의 헛됨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들려줄 것이다. 바로 그 헛됨이 부처가 말한 저 ‘제행무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른바 3고에 포함되는 괴고 행고, 즉 무너짐(상실)의 괴로움과 변화의 고로움도 다 이 헛됨을 알려준다. 이런 것을 주제로 한 소설, 드라마, 영화 들 또한 한도 끝도 없다. 소위 ‘상실의 시대’도 그중 하나다. 조설근의 <홍루몽>에 나오는 ‘호료가’도 그중 하나다. 부처가 통찰한 그 무상함, 그 헛됨, 그건 정말이지 진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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