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명심보감의 원저자 추적(秋適)(2)
진주성-명심보감의 원저자 추적(秋適)(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01 15:0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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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명심보감의 원저자 추적(秋適)(2)

이와 같은 현상이 생긴 이유는 단순하다.

노당 추적선생의 조부께서 송나라 사천대에서 근무하다 황제 명을 받아 고려 땅으로 들어와 함흥에 정착하게 되었다. 노당의 부친 추영수께서 상서 벼슬 등 고위직을 역임했으나 노당선생의 손자 2명이 중국으로 돌아가실 때 명나라 건국 초기의 엄청난 전국적인 혼란기를 맞아 조부의 책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었다.

조선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노당 추적의 고손자 추수경(완산부원군 추증)장군께서 아들 5명과 무강자사 군병을 영솔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명심보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다.

중국과 조선을 수시로 왕래하다 보니 노당 추적 선조의 책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6, 7명의 저자가 나타나 축소. 대폭 증편. 내용 첨삭 등을 거치면서 혼란케 되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성종의 어머니 한씨(왕후)께서 <내훈>을 지을 때 <소학>, <열녀전>, <명심보감>을 저본으로 했다고 한다(1533년)
암행어사 임문영의 상소문에 <명심보감>을 국민도의교본으로 삼을 것을 건의(1587년)하기도 했다.

정조 대왕은 명심보감을 사모해 반복해서 강론했다는 연구 논문도 있다.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 정옥자, 일지사, 2000년>

일본 둥경교육대학 측에서 최근에 발견해 공개한 <명심보감>, <명심정문>에 의하면 율곡 이이 선생의 서문이 있고 노당 추적 선생이 지은 <명심보감>을 찾아 내기도 했다.

<명심보감> 판각본은 대구시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재 장손 추연섭 전 중학교 교장이 영어로 해석하고 교육시키고 있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이끌고 있으며 각 언론 방송에 수 십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관광차 방문해 보는 것도 보람있고 좋은 일이다.

<명심보감>은 노당 추적 선생이 원저자임이 확실해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6명의 저자들은 모두 가짜이며 남의 글을 도용한 도적들이다.
명.청시대에는 남의 글을 도용해 자기 글인 것처럼 도적질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 온다, 청렴결백하고 수범자 노당 선생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일생동안 모범 생활하고 교육자로 역할을 다한 노당을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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