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슬픔이 슬픔에게로 가는 길
시와 함께하는 세상-슬픔이 슬픔에게로 가는 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01 15:0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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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슬픔이 슬픔에게로 가는 길

동시대를 함께 늙어간다는 일이
행복이라고 말한 벗이
한 생애 동반자를 잃었다 하네
그동안 손가락 깨물어 피 흘려 넣는 병구완이라
정성이 하늘에 닿고도
몇 차례 돌아오는 시간
아픔이 닳아 무색한 아픔일까

어깨가 흔들리는 듯, 지금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기도 한 꾸러미 데리고 내게 허락된 하루
슬픔이 슬픔에게로 가는 길
(강희근, ‘부음’)

선생은 내가 사는 지역의 원로 문인으로 후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며 후인들 역시 많은 가르침을 받는 처지다. 세월 이길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그렇게 후학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침을 내리시던 선생 또한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처지기 때문일까,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와 더불어 자연의 순리를 많이 생각하고 계시는 듯하여 가슴이 아프다.

시인의 절친한 벗이 부인과 사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배우자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끝내 사별했다는 말로 마무리한 사연이 가슴 뭉클하다. 병구완한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사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조선 후기 충북 괴산에 민동량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노환으로 증세가 위독해지자 단지진혈(斷指進血) 즉, 손가락을 잘라 흘린 피를 먹여서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했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처럼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는 병구완이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인의 친구가 부인의 병간호를 하는 동안 정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그의 부인의 생명을 연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의 내용으로 볼 때 그의 병구완은 정성이 대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친구의 부인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사연과 함께 오롯이 남은 친구의 슬픔은 곧 시인의 슬픔이기도 하다는 사연이다.

시인 역시 연로한 형편이며, 이러한 친구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 친구에게 조문하면서 흐느끼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 역시 격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한 친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시인 역시 고인의 명복을 빌며 함께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인의 슬픈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슬픔이 친구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과정을 서술한 가슴 뭉클한 슬픔이 슬픔에게로 가는 위로의 길을 노래하는 것이 된다.

흔히 우리는 노인을 단순히 나이에 기준을 주면서 생물학적으로 노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자의 ‘늙을 노(老)’의 다른 의미는 노련하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이란,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여 단순히 책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으로 뜻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인생의 유경험자인 노련한 노인들로부터 현명한 해결책을 들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노인은 단순히 신체적으로 노쇠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가르침을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전부터 노인을 공경하고 예를 다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강희근 시인의 <부음>은 우리가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자연의 이치라는 것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즉, 일생 동안 고락을 함께해온 사랑하는 부인과 사별한 친구의 슬픔에 대해서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는지에 대해서 충분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장중한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비교적 짧은 시이지만 반대로 담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깊고 중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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