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4)-고행(자기학대)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4)-고행(자기학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05 14: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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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4)-고행(자기학대)

“나 이전에도 나 이후에도 나와 같이 고행하는 자는 없었고, 없을 것이다”(맛지마 니까야 중에서)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그것은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한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초전법륜경)
“그러나 이 법은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최상의 지혜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남에 이바지할 뿐이다”

우리는 불교와 관련해서 ‘고행’이라는 말을 익숙하게 듣고 있다. 불교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게 불교적 수행의 일종인 줄 알기도 한다. 그런데 아니다. 부처는 오히려 이것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두 극단’ 중의 하나로 규정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게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하다는 말이다. 그는 왜 이것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을까? 위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신이 직접 해봤기 때문이다. 해보니까 ‘아니더라’는 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경험적 지식 혹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평가인 셈이다. 경전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 해본 고행은 네 가지였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이를 악물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을 억누르는 고행, 두 번째는 숨을 쉬지 않는 선정을 닦는 고행, 세 번째는 일체의 모든 음식을 끊어버리는 고행(즉 단식), 그리고 네 번째는 극도로 적은 음식으로 연명하는 고행, 이 네 가지다. 이런 고행들의 결과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에, 모든 수족은 울퉁불퉁한 뼈마디로 이루어진, 쇠약한 곤충 같다. 엉덩이는 물소 발굽 같고, 등뼈는 공을 한 줄로 꿴 듯 튀어나왔고, 갈비뼈는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다. 눈동자는 우물 바닥에서 반짝이는 물처럼 눈구멍 깊숙이 가라앉았다. 머리가 죽은 덜 익은 채 버려진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오그라든 것처럼 되었다.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었고, 대소변을 보기 위해 일어나면 즉시 그 자리에 엎어졌다. 사지를 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극도의 쇠약. 피골이 상접하고 갈비뼈만 앙상하고 눈은 움푹 들어간 모습이다. 이런 몰골은 파키스탄의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그의 고행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게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 설법에서 그가 이 사실을 언급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시행착오를 겪지 말라는,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혹은 이런 쪽으로 수행자를 호도하지 말라는 유경험자의 친절일 수도 있다. 자비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고행은 명백히 잘못된 방법론이다. 이건 일종의 자기학대다. 숨을 쉬지 않고 밥을 먹지 않는 것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다. 핵심은 그거다. (사람을 학대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불교라는 게 애당초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가치체계인만큼 괴로움으로 괴로움을 다스린다는 건 이치에 잘 맞지 않는다. 부자연스럽다. 나는 불교의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늘 의문이었다. 고행이 만일 득도에 유효한 것이라면 사람이 애당초 숨을 쉬도록 되어 있고 밥을 먹도록 되어 있다는 이 자연의 이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고행과 득도의 인과관계는 또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부처도 결국 그건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건 정답이 아닌 것이다. 애당초 숨과 밥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이게 만일 유효한 것이라면 호흡곤란과 기아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특별히 머리 좋은 인도사람들이 구태여 이런 짓을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범속한 사람의 범속한 짐작이지만, 그건 아마도 욕망의 차단이 아니었을까. 모든 구체적인 세속적 욕망들, 그리고 그 원천적 극단에 있는 살고자 하는 욕망…(숨과 밥은 삶의 최근원적 조건이니까) 그걸 차단한다면 거기 해탈(벗어남)의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처가 직접 해본 그 고행과 좌정 사이를 고민해본다. (보통사람들은 어차피 이쪽도 저쪽도 다 쉽지가 않다. 웬만큼 독종이 아니고서는 버티기는커녕 마음먹기도 시도하기도 쉽지가 않다. 부처는 그 양쪽을 다해냈으니 시쳇말로 독종도 보통 독종이 아닌 셈이다.) 내 고민의 방향은 일종의 절충이다. 적당한 고행과 적당한 좌정이다. 이건 자기와의 혹은 욕망과의 타협일지도 모른다. 무분별한 식욕의 적당한 절제, 집착의 조절, 안정적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음, 그리고 고와 그 해탈이라는 이 생적-실존적 주제에 대한 방향설정과 그 끈을 놓지 않음, 즉 지속적인 사유활동…이 정도는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너무 소박한가? 아니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치열한 출가수행은 아니더라도) 이것만 해도 실은 대단한 일이다. 온 세상에 가득 차 넘실거리는 건 온통 과도한 욕망의 파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웬만한 통제만 해도 범속한 사람들에겐 거의 해탈에 가깝다. 그런 걸 우리는 인격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그것만 해도 어디야…나이 들면서 요즘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부디 부처님도 이런 말에 염화시중의 미소로 화답하시기를 기대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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