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 명석면의 운돌(鳴石)
진주성-진주 명석면의 운돌(鳴石)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08 15:1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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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 명석면의 운돌(鳴石)

명석(鳴石)은 쉬운 말로 해석하면 눈물을 흘리는 돌, 우는 돌이라는 뜻이다. 행정구역명인 진주시 명석면은 바로 돌에서 시작되었다.

운돌의 역사가 오래 되었다. 고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몽고가 우리 고려로 침략해 온다는 말이 퍼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각 고을로 파발마를 띄워 대비책을 강구하라로 지시를 내리게 된다.

당시 토석으로 구축된 진주성이었기 때문에 어명에 따라 석성(石城)으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남녀노소 신분 직업에 상관없이 참여토록 총동원령이 내렸다.
스님도 석성을 쌓기를 마치고 해당 절로 돌아가는데 명석면 신기리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산 위에서 돌이 굴러 내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본 스님이 두 돌을 보면서 “돌들아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게 되었다.

“나는 진주성 쌓는데 성 돌이 되고 싶어 가는 중이요”라고 대답했다. 스님이 말하기를 “진주성 쌓기가 끝나고 나는 산사로 돌아가는 중이다”라고 답하니 두 개의 돌들이 대성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님은 너무 감화 감동을 받고 두 돌을 향해 합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 같은 소식을 듣게 된 지역민들이 신령한 영물이라고 보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안치하고 소원을 빌게 되었다고 한다.

두 돌이 만난 곳을 구배골 구복동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역민들은 돌이 울었다는 뜻으로 운돌골 즉 명석으로 짓고 호국충성을 기리게 되었다고 전해 온다.

조선 순조 때 명석리가 되고 조선 고종 때 명석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산해경>에 보면 중국 광서성 힁현 서쪽 10리에 우는 돌이 많다는 뜻으로 명석산이라 한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한 쌍의 돌 수컷 돌과 암컷 돌로 구성되어 남녀를 가르친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두 돌이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1970년 음력 3월에 동전마을 앞으로 옮겨 합석케 했다.

1973년에는 두 돌을 보호하는 명석각을 지었고 성기 상징물인 숭배 목적인 다산, 자녀 기원, 민속 의식 등에 이용되었다.

1988년 12월 경남도 민속자료 12호로 지정되어 보호 중이다.

2010년 4월 16일 명석면 출신 항일투사 김용익 선생 공적비가 명석각 마당에 건립되었고 또 김용익 선생을 기리는 세미나가 오는 7월 14일 실시되니 보국충정이 대를 이어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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