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5)-어디로?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5)-어디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19 15: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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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5)-어디로?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나는 ‘발걸음의 철학’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한평생 다닌 발걸음을 시각화해보면 거기에 우리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77억의 발걸음을 주목해 가정의 인생론적 가치를 말하기도 했고, 마른 곳이 아닌 진 곳을 굳이 찾아가는 발걸음을 주목해 도덕적 혹은 종교적 가치를 말하기도 했고, 돈과 지위와 성공과 명성, 혹은 주색잡기를 찾아가는 발걸음을 주목해 인간의 욕망론을 펼치기도 했다. 인간의 모든 발걸음에는, 혹은 그 발이 걷는 길에는, ‘어디로?’라는 방향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예수의 발걸음, 공자의 발걸음,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발걸음, 칸트의 발걸음, 그리고 회사원의 발걸음, 예술가의 발걸음, 난봉꾼의 발걸음…이런 걸 각각 생각해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부처의 발걸음은? 그 추종자인 스님들의 발걸음은? 그건 어디로 향했던 것일까? 설산으로, 보리수 아래로, 녹야원으로, 기원정사로…그게 답일까? 답이 아닌 건 아니지만 우리는 거기에 다시 ‘왜 거기로?’를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답이 위의 인용에 적시돼 있다. ‘안목, 지혜, 그리고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이다. 이걸 얻기 위해 그는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제도(구제)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걸었던 그 길에는 이런 쪽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혹은 도로표지판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안목, 지혜, 그리고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이란 어떤 것일까? 정리하자면 일단 ‘보는 것’이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고요함’과 ‘열반’의 상태 내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봄과 앎은 ‘도달함’을 위한 조건이다. 그런데 실제에 비추어 보면 봄과 앎은 사실상 다르지 않고 고요함과 열반도 사실상 다르지 않다.(지견[知見]이라는 표현과 3법인의 하나인 ‘열반적정’이라는 표현이 이 동일성을 알려준다.) 그래서 더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알아서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해를 위한 이런 단순화 작업은 데카르트가 알려준 방법론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유용하다고 판단한다. 바로 이 ‘알아서 고요해지는 것’이 부처의 발걸음이 걸었던 방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봄과 앎의 내용은 무엇이고 고요와 열반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연관돼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봄과 앎의 내용은 ‘오온개공’(조견 오온개공의 견이 그것을 알려준다.)이다. 그리고 고요와 열반의 내용은 ‘도 일체고액’이다.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반야심경)이라는 말이 그 편연적 연관성 내지 선후관계를 알려준다. 그런데 부처의 이 말들은 간단치 않다. 이 한마디가 사실상 불교의 모든 이론들과 다 얽혀 있다. 줄줄이 사탕처럼 하나의 개념을 당기면 팔만대장경의 모든 단어들이 줄줄이 다 딸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 불교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가? 고(苦)에서 시작해서 도(度)에서 끝난다. 괴로운 이쪽에서 고요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라는 주문도 그것을 위한 구호인 셈이다.

바로 그 고를, 일체개고를, 그와 연결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그리고 역시 그와 연결된 고집멸도 4성제를, 그리고 그것의 한 부분인 8정도를, 그리고 그 원리인 12연기를, 보고 아는 것이 바로 저 안목과 지혜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알아서 그 고를 벗어난 상태가 바로 저 고요와 열반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고가 우리를 고요하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적 논의들은 자칫 고답적인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대사나 선사의 이미지가 이런 단어들에(특히 어려운 한어에)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다. 부처의 이 언어들은 실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너무나 실제적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우리 자신들의 삶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외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 이 가치의 체계가 우리 인간들의 귀에 솔깃해지고 때로 우리의 가슴에 다가와 꽂히는 것이다. 불교는 여기서 시작이다. 괴롭지 않은 자에게는, 괴롭지 않은 동안에는, 불교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절간에 있는, 혹은 서가에 꽂힌 하나의 지적 장식일 뿐이다. 괴로움을 인식할 때 그때 그것은 비로소 나에게로 와 하나의 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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