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시 문산 찰방(察訪)
진주성-진주시 문산 찰방(察訪)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22 16: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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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시 문산 찰방(察訪)

문산읍은 조선시대에는 소촌역으로 호칭되었고 진주의 관문 역할을 하였고 찰방아래 서부 경남에서는 큰 역촌이었다.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대 탄압이 본격화 되자 전 조선에서 천주교인들을 잡아가 처단하는 색출이 찰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천주교인들을 잡아 가던 문산 찰방이 정반대로 천주교 성당이 되었다는 사실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으니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다.

문산 찰방이 서부 경남 교통 중심지에 위치하여 공문 전달, 관원들의 교통 안내, 정보 수집 등에 활용되었다.

문산 찰방은 평거역, 문화역, 의령의 지남역, 사천의 관율역, 곤양의 완사역, 고성의 배둔역, 남해의 덕신, 거제의 오양역, 진해의 상령역 등 인근 18개역을 관장하는 대표 수령급으로 인정되었다.

문산 찰방은 품계로 말하면 현감(종 6품)과 같은 급수이지만 조선 중앙정부의 통신 정보를 관리하고 암행어사가 특별우대를 받았던 곳이고 암행어사가 말을 이용할 때 즉시 징발된 곳이다.

관찰사 순찰사가 말을 이용할지 몰라 항상 준비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 4품 군수 종 5품 현령보다 큰 힘을 가졌다고 전해 오고 지방에서 찰방에 대하여 어떤 이유도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찰방이 역장, 역리, 역졸을 거느리고 사신 접대, 물자 조달, 정보 전달 등을 했기 때문에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임진왜란 때도 군사정보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곡면 진배미에서 군사 훈련하던 이순신(백의종군)을 찾아가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산 찰방 이시경은 진주 목사와 함께 이순신을 만나 왜적과 맞서 획득한 대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암행어사도 문산 찰방에서 얻은 정보를 활용했다. 문산 찰방이하 관리들은 대대로 세습되었고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1885년 근대식 우편제도가 신설되자 필요성이 극감해 프랑스 신부 권 마리오 줄리엥에게 판매되고 1905년 이후 성당 본당으로 개조하니 찰방 관아는 사라지니 충격적인 사건이다.

권 신부는 찰방 관아와 아전 관아 10여 동과 부지 2400평을 문산 성당으로 사용하게 된다.

문산 찰방은 1938년까지 건물을 그대로 이용되었으나 차례로 철거되고 문산성당이 완공되면서 완전 사라졌다.

문산 성당은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35호 지정되었고 보호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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